우리나라에서 100년 넘게 유지돼 온 전세 제도 폐지가 한발짝 더 가까워졌습니다.
정부는 지난 7일 부동산관계장관회의를 열고 '주택 공급 확대 방안'(9·7 부동산대책)을 내놨습니다. 이 대책에 전세를 없애는 제도는 담기진 않았습니다만 전세 폐지에 한발짝 다가가는 정책이 나왔다는 게 업계의 평가입니다.
이 대책에서 정부는 수도권과 규제지역 내 1주택자의 전세 대출 한도를 서울보증보험(SGI) 기준 3억원에서 2억원으로, 주택금융공사(HF)는 2억2000만원에서 2억원으로 줄였습니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 기준은 2억원으로 유지해 3대 보증 기관의 금액을 일원화했습니다. 전세 대출을 내준 데 따라 전셋값이 오르고 이는 집값을 밀어 올린다는 이유에서 일정 수준 조정이 필요하다는 게 정부의 생각입니다.
1주택자에게 최대 2억원까지만 전세 대출을 내주겠단 의미인데, 향후 다른 전세 계약을 맺을 경우 적게는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수억원을 직접 조달해야 합니다. 시장에선 이번 조치로 규제에 해당하는 1주택자들이 줄어든 한도만큼 이를 월세로 전환할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부동산 시장 전문가는 "자가를 마련해두고 교육 등으로 다른 곳에 나와 거주하는 1주택 전세 세입자들의 경우 이번 조치로 줄어든 한도만큼을 월세로 전환할 것"이라면서 "자금이 모자라 전세 거주가 힘들다면 자가로 실거주하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해당 집에 거주하고 있던 무주택 세입자는 시장으로 내몰리게 되는 꼴"이라고 말했습니다.
은행에서도 혼란은 빚어졌습니다. 한 시중은행 대출 담당자는 "기존에 대출 상담을 받았던 고객들이 대책의 영향은 없는지 등을 꽤 많이 물어봤다"며 "현재는 이렇다 할 지침이 없어서 당황스러운 상황"이라고 답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규제보다는 대책 이후의 질의응답에서 나왔습니다. 전세에도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을 적용하겠다는 것입니다. 전세 대출 역시 차주가 이자를 부담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만 빌려주겠단 얘기입니다.
'전세 대출 DSR 적용 도입 계획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정부는 "DSR을 전세대출 등에 확대 적용하는 것은 정부에서 일관되게 밝혀온 입장"이라면서 "향후 전세대출 DSR 적용이 가계부채 관리와 서민 주거 안정 등에 미치는 영향 등을 고려해 구체적인 시행 시기와 방식 등을 결정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전세대출 DSR 적용 등 추가 규제 카드를 꺼내는 시점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는가'라는 질문에는 "가계부채 증가율과 부동산 시장 상황이 기본적인 기준"이라면서 "구체적인 기준은 말할 수 없으며 상황별로 어느 정도의 대책을 써야 하는지는 생각하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너무 많은 규제를 한꺼번에 내놓으면 시장에서 혼란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추가 규제를 내놓겠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물론 규제하지 않겠단 얘기는 없었습니다.
또 다른 부동산 시장 전문가는 "이번에 나온 일련의 금융 규제를 보면 정부는 점차 '전세' 활용도를 떨어뜨리고 결국엔 없애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 같다"며 "전세가 이전처럼 서민들의 안정적인 거주와 자산 형성에 도움을 준다는 취지에서 벗어나 집값을 밀어 올리고 전세 사기의 원흉으로 지목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부에서도 이 제도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봤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시장에선 '전세의 월세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법원 등기정보광장에 따르면 전날 기준 1∼8월 전국에서 확정일자를 받은 월세 계약은 120만952건입니다. 지난해 같은 기간(95만3956건)보다 25.89% 급증했습니다. 같은 기간 전세는 70만8312건에서 72만3072건으로 2.08% 증가하는 데 그쳤습니다. 월세가 전세보다 더 가파르게 늘어난 것입니다.
한 부동산 시장 전문가는 "월세화 흐름이 더욱 강화되는 추세"라며 "전세나 월세는 실제 수요가 하방을 지지해 한 번 오른 가격은 하락이 어렵다. 최근 월세 상승 폭이 확대되며 체감 월세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상황이 이렇자 일부 계층에선 걱정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서 벌써 6년째 거주하는 20대 대학생 강모씨는 "그래도 처음 왔을 땐 전세가 꽤 있었는데 최근엔 전세 사기로 전세 보증금을 다 내기도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해서 월세를 꼬박꼬박 내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어렵다"며 "최근 1~2년 사이엔 다른 데 쓰는 돈을 줄여 월세에 보태고 있다"고 토로했습니다.
결혼은 앞둔 30대 직장인 백모씨도 "신혼집을 구하려고 발품을 팔고 있는데 전세는 워낙 없어 가격이 높고 꽤 많이 보이는 월세 역시 매달 나가는 금액이 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귀띔했습니다.
이송렬 한경닷컴 기자 yisr020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