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를 수 없는 곳에 머무르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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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JFK공항 한가운데 멈춰 서 있다. 수천 명의 발걸음이 스쳐 가지만 그는 어디로도 향하지 못한다. 주인공 빅터 나보르스키(톰 행크스 분)는 조국의 내전으로 한순간에 무국적자가 되었기에 공항에 발이 묶인 것이다. 그는 입국도 출국도 하지 못한 채, 유리와 금속의 차가운 공간에 홀로 남겨진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터미널>은 이렇게 시작한다. 경유지에 지나지 않는 공간에 한 사람을 고립시켜 그 거대한 건축물이 지닌 모순과 힘을 드러낸다. 그 과정에서 공항은 단순한 환승지가 아니라 감옥이자 집, 도시이자 세계로 변한다.

공항에 억류된 나보르스키 / 사진. 넷플릭스 제공

공항에 억류된 나보르스키 / 사진. 넷플릭스 제공

머무를 수 없는 공간, 비장소

공항은 누구나 익숙하게 오가지만, 그 장소 자체가 목적이 되진 않는 곳이다. 대합실, 탑승구, 검색대, 면세점까지 모든 동선은 머무름이 아니라 통과를 전제로 설계되어 있다. 우리는 그곳에서 정체성을 증명하는 서류를 제출하고, 규율에 따라 몸을 검색당하며, 절차에 순응하는 존재가 된다.

인류학자 마크 오제는 이런 공간을 ‘비장소(non-place)’라 불렀다. 장소(place)가 아니라는 뜻이다. 고속도로, 쇼핑몰, 대형마트, 철도역 등 현대 사회의 이동과 소비를 떠받치는 시설들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그는 비장소가 늘어날수록 우리의 삶이 개별화되고, 서로의 기억이 쌓이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터미널> 속 JFK 공항은 그 전형이다. 연간 6,200만명이 오가는 공간이지만, 그곳에서의 경험은 쌓이지 않고 잊혀진다.

그러나 나보르스키가 서류 문제로 발이 묶이는 순간, 그에게 공항은 전혀 다른 성격으로 다가오게 된다. 더 이상 잠시 스치는 곳이 아니라, 그의 삶과 정체성을 규정하는 강력한 무대가 된다. 금속 기둥과 유리벽이 반복되는 구조, 끝없이 늘어선 좌석과 광고판 그리고 차가운 조명들은 투명성과 개방성을 가장해 인간성을 억압한다. 얇은 유리벽 하나로 어느 곳 하나 쉽게 통과할 수 없다. 이렇게 넓은 공간 안에 그를 위한 공간은 하나도 없다.

자신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을 찾아 헤매는 나보르스키 / 사진. 넷플릭스 제공

자신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을 찾아 헤매는 나보르스키 / 사진. 넷플릭스 제공

비장소에서 장소로

<터미널>의 핵심은 비장소가 장소로 바뀌는 과정이다. 나보르스키는 67번 게이트 앞에 버려진 가구들을 모아 작은 거주 공간을 만든다. 아무 의미 없던 그곳은 화분과 따뜻한 조명 등 그의 손길을 거치며 생활의 온기를 띠게 된다.

오제가 정의한 비장소는 관계와 기억이 허락되지 않는다. 반면 지리학자 이 푸 투안은 『공간과 장소(Space and Place)』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간’은 인간의 경험과 시간이 축적될 때 비로소 ‘장소’가 된다. 물리적으로 그저 존재하기만 하는 ‘공간’은 일시적 체험으로는 결코 장소라 부를 수 없다. 그러나 반복된 체류로 축적된 행위가 그곳에 이야기를 불어넣을 때, 그 공간은 장소로 변화한다.

영화는 이 과정을 선명히 보여준다. 나보르스키가 의자를 이어 붙여 침대를 만들고, 카트를 반납해 적은 돈을 벌며, 새로운 친구를 만들어 우정을 쌓아가면서 공항은 더 이상 비장소가 아니게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에게 장소화 된 것은 아무 ‘공항’이 아니라 오직 ‘JFK공항’뿐이다. 그는 그 공항에 대해서만 기억을 남기고, 관계를 심고, 서사를 쌓아갔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우리의 일상 경험과도 닮았다. 매일 같은 카페에서 책을 읽거나 특정 역 출구에서 늘 친구를 만날 때, 기능적이기만 했던 그 ‘공간’은 어느새 개인의 이야기로 물든 ‘장소’로 변모한다.

빛의 연출 또한 장소가 되어가는 과정을 반영한다. 낮에는 천창을 통해 쏟아지는 자연광이 희망을 상징하지만, 밤이면 인공조명이 지배하며 고립감을 심화시킨다. 영화 초반 푸른빛으로 물들었던 화면이 시간이 흐르며 점차 따뜻한 색조로 변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차갑던 공간에 온기가 스며들고, 낯선 비장소에 이야기가 깃들어 장소화되는 그 흐름이 바로 영화의 본질이다.

자신만의 공간으로 꾸민 67번 게이트 앞 / 사진. 넷플릭스 제공

자신만의 공간으로 꾸민 67번 게이트 앞 / 사진. 넷플릭스 제공

비장소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

<터미널>의 공항은 영화 <트루먼 쇼>의 세트 도시와 비교할 수 있다. <트루먼 쇼>의 주인공 트루먼(짐 캐리 분)이 살아가던 마을은 거대한 돔 안에 세워진 완벽한 세트장이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생방송으로 중계되었고, 모든 행위는 치밀하게 설계된 틀 안에서 이뤄졌다. 그곳은 트루먼 한명을 위해 정교히 설계된 공간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통제와 기만의 장치였다. 그가 평생을 지내며 추억을 쌓았지만, 거짓으로 가득한 그 세트장을 과연 의미 있는 장소라 부를 수 있을까? 그가 자기 삶을 찾는 유일한 방법은 결국 그 공간을 떠나는 것이었다.

<트루먼 쇼>의 세트장이 단 한 사람을 위해 조율된 완벽한 허구라면, <터미널>의 공항은 애초부터 누구에게도 개인적 의미가 없는 비장소였다. 비록 나보르스키가 원해서 머물게 된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는 그 안에서 능동적으로 돈을 벌고, 문제를 해결해주고, 친구를 사귀며 스스로 의미를 새겨넣는다. 떠남이 아니라 머무름 속에서 그는 삶의 의미를 회복한다.

<트루먼 쇼>는 거짓된 장소로부터의 ‘이탈’의 이야기이고, <터미널>은 비장소를 장소로 바꾸는 ‘전환’의 이야기다. 두 영화는 모두 건축적 공간이 인간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또 인간이 어떻게 공간을 재정의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그 방식은 달랐다. 트루먼은 ‘떠남’을 통해 주체가 되었고, 나보르스키는 ‘머묾’을 통해 주체가 되었다. 결국 공간은 인간을 규정하지만, 동시에 인간 역시 공간을 새롭게 정의한다.

조작된 공간인 세트장을 떠나는 트루먼 / 사진. 넷플릭스 제공

조작된 공간인 세트장을 떠나는 트루먼 / 사진. 넷플릭스 제공

제2의 집인 공항을 떠나는 나보르스키 / 사진. 넷플릭스 제공

제2의 집인 공항을 떠나는 나보르스키 / 사진. 넷플릭스 제공

비장소와 장소의 경계에서

<터미널> 속 공항은 감옥이자 집이며, 세계를 향한 창이자 자유를 차단하는 벽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머무름이 허락되지 않았던 비장소가 한 인간의 손길과 시선을 통해 집이자 도시, 삶의 무대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마크 오제의 비장소 개념은 공항의 무정한 익명성을 설명하지만, 이 푸 투안의 통찰은 그 무정한 공간조차 경험과 시간이 축적되면 따뜻한 ‘장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나아가 <트루먼 쇼>와의 비교는 건축이 인간을 구속하는 방식과 인간이 공간을 재정의하는 방식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터미널>은 이렇게 묻는다. 공간은 인간을 규정하는가.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답할 수 있다. 시간과 이야기가 공간에 깃드는 순간, 비장소는 장소로 거듭난다.

최영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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