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공공재 생산하던 美, 이젠 없다
‘동맹의 적’ 불분명한 것이 진짜 문제
트럼프도 對中 강경일변도 쉽지 않을 듯
트럼프의 미국은 우리가 알던 미국이 아니다. 미국은 지난 1000년간 패권국 가운데 글로벌 공공재를 고안하고, 자기 돈 들여 유지한 유일한 나라다. 그런 미국이지만 이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떠안았던 글로벌 질서 유지 책무를 벗어던지고 있다. 나토 탈퇴를 거론하고 있고, 자신이 만든 국제무역 질서인 WTO 체제를 깼고, 유엔의 존재를 성가시게 여기고 있다.
미국은 이런 글로벌 공공재를 만든 뒤 반대급부를 챙긴 것도 사실이다. 자국 기업 이익을 챙겼고, 달러 발권국의 지위를 누렸다. 그럼에도 패권국이 굳이 모두를 위한 제도를 만든 것은 ‘우리는 인권 자유 민주주의 시장경제의 수호자인 특별한 나라’라는 독특한 믿음이 작용했다는 걸 부인하긴 어렵다.
역대 미 대통령들은 이런 질서 유지 책무를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하지만 모든 걸 손익(損益)으로 치환하는 트럼프는 반대편 길을 걷고 있다. 징벌적 관세 부과로 자유무역 흐름에 제동을 걸었고, 기후변화협약과 유네스코 등에서 탈퇴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확인된 것처럼 ‘미국은 더 이상 유일 패권국이 아니다’라는 자각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이런 트럼프가 한미동맹을 ‘돈 먹는 하마’로 보는 건 이상할 게 없다. 올봄 공개된 미 국방부 내부에서 회람된 지침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가정이 가능하다. 트럼프는 김정은과 3차례 만남을 통해 ①북핵 위협은 핵우산을 한국에 제공하면 통제 가능하고 ②북한의 탄도미사일 등 재래식 군사 위협은 한국과 일본이 손잡으면 막을 수 있다고 믿게 됐을 수 있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주한미군 2만8500명은 엉뚱한 곳에서 힘을 쓰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③대만처럼 더 민감한 방어에 투입한다는 정책 제안을 받았을 때 솔깃했을 수 있다.
국방부가 9월 이후 공식 발표할 ‘국방전략 잠정지침’의 초기 구상에는 한반도와 밀접한 ①②③ 구상이 담겨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없다. ①은 당연한 일이지만, ②는 한반도 방위공약 약화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1950년 초 미국은 남한을 뺀 채 애치슨 라인을 긋는 바람에 북한의 오판을 재촉했다. 트럼프식 애치슨 라인이 2개 그어지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핵 애치슨 라인에는 한국이 포함되지만 재래식 애치슨 라인에는 한국이 포함되는지 불분명한 것 아닌가. 트럼프 요구처럼 ①은 주한미군 분담금 늘리고 ②는 우리 국방비를 국내총생산 대비 5%까지 늘리는 방식 등으로 풀어갈 수 있다.
동맹은 친구끼리가 아니라, 공동의 적을 가진 나라가 맺는 것이다. 극적인 사례가 나치 독일과 싸운 루스벨트의 미국과 스탈린의 소련이다. 상극 관계인 두 나라는 ‘연합국’의 이름으로 느슨한 동맹이 됐다가 종전 후 곧바로 적으로 돌아섰다. 북한을 상대로 강고했던 한미동맹은 안보 환경 변화로 느슨해질 여지가 생겼다. 우리 정부에 북한을 적으로 부르길 꺼리는 기류가 분명히 생겼고, 트럼프 역시 김정은과의 우정을 자랑하고 있다. 중국도 그렇다.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을 ‘전략적 경쟁자’로 불렀고, 바이든 행정부는 적국(foreign adversary)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한국은 중국을 적으로 여기기 어렵다. 좌건 우건 마찬가지다. 이재명 대통령도 ‘셰셰’나 ‘외계인 침공’ 발언에서 알 수 있듯이 공개 발언은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한미동맹이 흔들린다면 미국이 달라진 탓도 크지만 공동의 적이 모호해진 것이 더 본질적일 수 있다.알려진 대로 ③은 한국엔 큰 리스크 요인이다. 한미 외교장관 회담 후 “동맹의 생각이 다 같을 순 없다”는 설명은 ③에 대한 설명일 것이다. 미국은 일본과 호주에 했듯이 우리에게도 “대만서 미중 충돌 때 한국은 뭘 할 거냐”를 물었을 수 있는데, 선뜻 답을 내놓기 어렵다.
미국은 중국과 관세 협상을 매듭짓지 못하고 11월까지 3개월 유예했다. 미국의 압박에 중국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는 방증이고, 이런 기류라면 미 국방부가 9월쯤 국방전략(NDS) 보고서를 발표할 때 대만과 관련한 군사적 대응을 대놓고 거론하기 쉽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쩌면 관세 타결과 미 정부의 의견 일치가 먼저 이뤄져야 하는 만큼 이재명 정부는 시간을 조금 더 벌게 될 수 있다.
김승련 논설실장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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