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 마이크를 잡은 여성은 ‘인천 스토킹 살인 사건’ 피해자의 언니였다. 2023년 7월 인천 남동구에서 30대 여성이 옛 연인에게 흉기로 찔러 숨졌다. 가해자는 100m 접근 금지 등 법원 명령을 받았음에도 지속적으로 스토킹했다. 피해 여성은 신변 보호용 스마트워치를 경찰 안내에 따라 반납한 지 4일 만에 살해당했다. 유족이 고통스러운 기억을 끄집어낸 이유는 일주일 사이 스토킹 등 관계성 범죄로 3명 이상 숨졌기 때문이다.
신고-조치 이뤄져도 살해당하는 현실
지난달 26일 경기 의정부에서 50대 여성이 스토킹범에게 살해됐다. 이틀 뒤 울산 북구에서 20대 여성이 스토킹하던 남성의 흉기에 찔려 중태에 빠졌다. 같은 달 29일에는 20대 남성이 대전 서구에서 사귀던 여성을 살해했고, 31일 서울 구로구에선 여성이 동거하던 남성에 의해 숨졌다. 사건이 벌어진 과정을 보면 분노를 넘어 허탈감까지 생긴다. 피해자들은 수차례 가해 남성들을 경찰에 신고했고, 각종 법적 조치가 내려졌음에도 목숨을 잃었다. 의정부 스토킹범은 접근 및 통신 금지 조치를 받았다. 울산 사건 피해 여성에겐 스마트워치 지급, 자택 순찰 등 신변 보호 조치가 이뤄졌다. 하지만 두 사건 모두 가해자에 대한 구금 등 보다 강력한 조치는 검찰 단계에서 반려된 뒤 피해자가 살해됐다.이 정도면 법이 존재하는 이유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2021년 제정된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은 이미 여러 명이 희생된 후에야 나온 법이다. 1999년 처음 발의된 후 20년 이상 국회에서 계류됐다. 2021년 3월 스토킹 가해자가 25세 여성과 동생, 어머니를 죽인 ‘노원 세 모녀 살인 사건’이 터진 후에야 국회를 통과했다. 이 법에 담긴 반의사불벌 조항 탓에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합의를 종용하는 등 시행 초기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2022년 9월 20대 여성 역무원이 스토킹범에게 숨진 ‘신당역 살인 사건’이 발생한 뒤 반의사불벌 조항이 폐지되는 개정이 이뤄졌다.
관계성 범죄 관대하게 보는 인식 바꿔야
스토킹처벌법을 적용하려면 ‘상대방 의사에 반하고’ ‘행위가 지속, 반복적이고’ ‘불안감(공포심)을 일으키는 것’ 등이 전제돼야 한다. 일선 경찰들은 “기준이 개인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돼 조치를 취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한다. 법원에선 조항들이 자의적으로 해석돼 스토킹 피해가 인정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인천에선 이별을 통보받은 남성이 254번 전화를 걸고, 50회 문자를 보내다 신고됐다. 법원은 스토킹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피해 여성이 답문을 보내는 등 상호 간 의사가 교류돼 한쪽 의사에 반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대구지방법원은 옛 연인 주거지를 서성이다 한 달 뒤 자택 안으로 침입한 남성에게 ‘비연속적 행위’라 스토킹으로 볼 수 없다고 판결했다. 피해자들은 관계성 범죄를 심각하게 보지 않는 사회 인식부터 바꿔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들이 수사기관 등에서 자주 듣는 말은 “초범이니 봐주자”, “사랑해서 한 행동”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스토킹 범죄 신고는 지난해 3만1947건에 달했지만 구속률은 3%에 그쳤다. 전자발찌 부착, 유치장 구금 인용 비율도 30, 40%대에 머물렀다. 스토킹이 폭력, 상해로 이어지는 비율이 35%나 되는데도 말이다.옛 연인, 배우자에 의해 살해된 여성은 지난해 181명, 이틀에 한 명꼴이다. 피해자 유족이 기자회견에 나선 날, 경찰은 스토킹처벌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사람이 죽은 후에야 법을 고치는 악순환이 더 이상 반복돼선 안 된다.
김윤종 사회부장 zoz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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