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눈 마주치면 ‘저 사람도…’ 피해자는 두렵다[N번방 너머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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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N번방 사건’부터 ‘서울대 딥페이크 사건’, ‘목사방 사건’까지. 디지털 성범죄는 사건의 이름만 달라졌을 뿐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최근 5년 사이 국내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는 7배 증가했고 그중 10대 피해자는 무려 20배나 늘었습니다.

디지털 성범죄의 피해자들은 흔히 ‘내 인생은 이제 끝났다’는 절망에 빠지곤 합니다. 하지만 그때 ‘그렇지 않다’고 손을 내밀고 피해자를 위한 울타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N번방 너머의 이야기’에서는 이들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피해자의 회복을 위해 우리 사회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도 짚어보겠습니다.

아무리 지워도 사라지지 않고 떠도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 촬영물과 끝없이 재유포되는 영상들. 누가 언제 올렸는지조차 정확히 알 수 없는 피해물을 맞닥뜨린 피해자는 혼란과 공포에 휩싸인다. 하지만 그런 피해자가 일상을 포기하지 않도록 곁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전북 전주성폭력상담소의 상담원 한그루 씨(활동명)도 그중 한 명이다. 한 씨는 4년째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심리 상담부터 수사 및 법률 지원, 피해물 모니터링과 삭제를 맡고 있다.

N번방 너머의 이야기 1회에서는 한 씨를 통해 디지털 성범죄 피해가 강간이나 추행과 같은 기존의 ‘물리적 성범죄 피해’와 무엇이 다른지를 담았다. 피해자의 건강한 회복을 위해 가장 필요한 건, 이들의 고통을 정확히 이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동아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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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만난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점은 무엇인가요.

“디지털 성범죄 피해는 누군지 전혀 알 수 없는 익명의 불특정 다수에게 원하지 않는 모습이 강제로 드러나는 겁니다. 그 자체로 공포이자 불안입니다. 어떤 피해자는 모든 걸 포기한 채 칩거하고요.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습니다. ‘지금 길을 가는 저 사람도 내 사진을 봤을까?’ ‘저 사람이 내가 그 영상에 나오는 사람이라고 알아보는 건 아닐까?’ 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직장도 다닐 수 없고 아르바이트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피해 상황이 ‘피해자와 가해자’ 둘 사이에서 발생하는 물리적 성범죄 피해와는 확실히 구분되는 점이네요.“맞아요. 그렇다 보니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는 피해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피해 상황을 정확히 알기가 어렵습니다. 촬영물을 유포하겠다는 협박을 당한 피해자는 밤새워 구글링하며 자신의 모습이 온라인상에 올라와 있는지 직접 ‘모니터링’ 하곤 해요. 피해물을 찾든 못 찾든 이 과정 자체가 피해자에게는 정신적으로 큰 소진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상담소를 찾아온 한 피해자분도 ‘이제 내가 직접 모니터링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게 가장 다행스럽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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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는 피해물의 유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다가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다른 사람을 통해 인지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2023년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이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100명을 조사한 결과, 자신의 피해 사실을 다른 사람(가족, 수사기관, 가해자, 모르는 사람)을 통해서 인지한 경우가 81명에 달했다. 본인이 알게 된 경우는 단 19명에 불과했다.

유포 상황을 인지하게 되더라도, 이미 피해가 발생하고 한참이 지난 뒤인 경우가 많다. 이 조사에서 피해 발생 후 피해를 인지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1년 이상~3년 미만이 28명으로 가장 많았고 심지어 5년 이상 걸린 경우(4명)도 있었다. 즉, 온라인상에서 피해물의 확산 여부와 속도를 피해자가 정확히 파악하고 통제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이것이 디지털 성범죄의 특징이다.

―디지털 환경의 익명성이 가해자 특정을 어렵게 만들다 보니 피해자들의 좌절도 커질 것 같습니다.

“수사가 진행되는 게 피해자 눈에도 보여야 회복에 도움이 되는데 그렇지 않으니까요. 수사가 진행돼 재판까지 간다고 해도 디지털 성범죄자에 대한 형량은 여전히 너무 낮아요. 어떤 판결문은 그 자체만으로도 피해자의 일상 회복에 도움이 됩니다. 그런 판결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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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본다고 느끼시나요.

“유형에 따라 조금씩 다른 것 같아요(디지털 성범죄는 불법 촬영, 유포, 유포 협박, 유통·소비 등으로 나뉜다). 예를 들어서 공중화장실에서 불법 촬영 피해를 당한 피해자에게는 ‘화장실에 침입한 가해자가 잘못했다’는 공감대가 비교적 쉽게 형성돼요. 하지만 피해자가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딱 붙는 옷을 입은 사진을 올렸고 누군가 그 사진을 합성해 유포했다면…. 이 경우에는 ‘사진을 올린 피해자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시선들 때문에 위축되는 피해자들을 보면 안타까워요. 그래서 상담할 때마다 ‘이건 100% 가해자 잘못이고 사회적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해 드리죠.”

한 씨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가 여전히 디지털 성범죄를 피해자의 행실과 연관 짓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같은 피해자라도 어떤 경우에는 ‘순수한 피해자’로 인정받지만, 어떤 경우에는 ‘자초한 피해’로 여겨지는 것이다. ‘밤늦게 짧은 옷을 입고 돌아다니면 성범죄의 표적이 된다’는 식의 그릇된 통념은 많이 사라지고 있지만, 디지털 성범죄에서는 여전히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시선이 남아 있다.

―내 주변에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가 있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최근엔 지인을 대상으로 한 디지털 성범죄가 너무 많습니다. 학교나 직장 내에서 사건이 발생하면 피해자와 가해자 둘 다 자신의 지인인 경우가 흔하죠. 그렇다 보니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로 가해자 편을 드는 경우도 있고, 가해자에게 사건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하다 보면 가해자가 증거를 인멸하게 돼 결과적으로 가해자를 조력하게 되는 일도 생깁니다. 주변에 피해자가 있다면 피해자를 보호하고 도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주세요.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다면 주변에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건 자제하고, 피해자가 탄원서 작성 등의 도움을 요청할 때 응해준다면 큰 힘이 될 겁니다. 주변인으로서도 위치와 관계에 따라 역할이 다를 수 있습니다. 고민스러울 땐 가까운 상담소에 문의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기사를 보고 있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우리가 그 어떠한 폭력에도 전혀 노출되지 않는 안전한 삶을 살 수 있다면 너무 행복하겠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는 폭력이 만연해 있습니다. 피해를 입은 사실도 아예 없었던 일이 될 수는 없겠죠.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의 진정한 회복이란 범죄 피해로 인해 일상이 잠깐 멈췄더라도 영원히 멈추지는 않는 것. 그래서 피해자가 앞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 함께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의 회복에 대해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분은 ksy@donga.com으로 연락주세요. 회복의 경험을 나누고 싶은 피해자, 피해자를 지원하는 기관 종사자 또는 수사당국 관계자, 전문가 등 어떤 분이어도 좋습니다. 피해자는 신원 보호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겠습니다.

김소영 기자 ks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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