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한국을 찾는 관광객들은 서울 명동이나 N서울타워에 설치된 현금자동인출기(ATM)에서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인 테더(USDT)와 서클(USDC) 등을 원화로 바꿔 사용하고 있다. 금융 계좌가 없는 일부 외국인 노동자들은 가족에게 송금하기 위해 스테이블코인으로 임금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이렇듯 이미 일상으로 스며든 스테이블코인은 법제화를 앞두고 있다. 미국에서도 스테이블코인을 규율하는 ‘지니어스 법안’이 지난달 상원을 통과했고, 다음 주 하원에서 심의가 이뤄진다. 한국에서도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 포함된 데다 도입 필요성을 주장해왔던 김용범 대통령정책실장이 임명됐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에서도 원화 스테이블코인 규율 등을 담은 ‘디지털자산기본법’을 발의하며 지원 사격에 나섰다.
문제는 시장의 과도한 기대감이다. 스테이블코인 도입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시장에서는 시중은행과 빅테크를 중심으로 관련 상표권 출원 경쟁이 잇따르고 있다. 수혜주로 주목받은 카카오페이는 5월 중순까지 3만 원 안팎에 머물던 주가가 지난달 9만 원을 넘어섰고 두 차례 투자위험종목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스테이블코인 사업에 대한 인프라나 구체적인 로드맵도 없이 묻지 마 테마주로 묶여 주가가 급등락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의 본래 목적과 정반대인 불안정한 시장이 펼쳐진 것이다.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싼 정부와 통화당국의 엇박자도 혼란을 키우고 있다. 정부는 달러 스테이블코인 확대로 약화될 수 있는 통화 주권을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행은 ‘코인런’(대규모 코인 인출)과 금융 안정 훼손 가능성을 이유로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디지털 화폐 기능을 하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민간 은행이나 비금융회사가 무분별하게 발행하게 되면 한은 통화정책의 약발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달러화와 달리 기축통화가 아닌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글로벌 확장성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국제 거래에 있어 활용도가 낮고 환율 변동성도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이창용 한은 총재도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존재가 달러 스테이블코인으로의 전환을 더 쉽게 만들고 의도치 않게 통화 주권을 더 약화시킬 수 있다고 걱정한다. 일각에서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이재명 정부의 확장 재정 기조에 부합하는 정책 수단이 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국채를 담보로 손쉽게 발행할 수 있는 ‘소비 진작용 디지털 바우처’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부와 여당이 혁신이라는 꼬리표를 붙여 무리하게 속도전으로 밀고 나간다면 시장을 안정시키기는커녕 또 하나의 투기 장치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특히 금융 시스템은 정책의 신뢰성과 안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무분별한 투기 심리가 가세하지 않도록 시장의 기대를 안정시키면서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의 편익과 위험의 균형을 찾는 제도를 설계해야 뒤탈이 없다.박민우 경제부 차장 min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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