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공지능(AI) 기본법 하위법령 제정을 앞두고 투명성 의무가 최대 쟁점으로 떠올랐다. '오징어 게임'과 '킹덤'의 성공, 블랙핑크와 BTS의 확장, 게임사의 해외 공략은 K콘텐츠의 저력을 증명한다. 그러나 과도한 AI 투명성 규제는 이 상승 곡선을 꺾을 수 있다. 글로벌 OTT의 투자 확대 국면에서 규제 설계의 미세한 차이가 수출 경쟁력을 좌우한다.
AI 기본법 제31조는 생성형 AI 사용 시 사전고지·표시 의무를 둔다. 정부의 하위법령(안)은 고영향·생성형 활용에 원칙적 표시의무를 부과하되 예외를 예고했다. 핵심은 예외의 범위와 기준이다. 일률 규제는 창작 생태계의 비용만 키우고 혁신을 저해한다. 게임·엔터 현장에서 AI는 텍스처·레벨 디자인, NPC 대화, VFX·색보정·음향, 믹싱·마스터링, 웹툰 배경·채색 보조까지 깊게 스며들었다. 모든 단계에 'AI 사용' 표기를 강제하면 몰입은 깨지고 제작비는 폭증한다. 특히 실시간 렌더링이나 프로시저럴 생성은 표준이며, 이용자도 이를 당연시한다. 유럽연합(EU) AI Act 제50조는 이를 예방하는 장치를 제시한다. 제50(1)은 '합리적으로 잘 알고 있는 자연인의 관점에서 사용이 명백'한 경우 고지 면제를, 제50(2)는 보조 기능·의미 비변경 편집에 기계 판독 가능한 형식의 최소 표식을, 제50(4)는 예술·창의·풍자·허구물의 비방해 공개를 정한다. 우리도 같은 맥락의 맥락 기반 면제를 도입해야 한다.
수범자 범위도 명확히 해야 한다. EU처럼 '제공자(provider)'와 '배포자/이용자(deployer)'를 구분하고, 대다수 콘텐츠 사업자처럼 AI 서비스를 이용하는 주체는 원칙적으로 표시의무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하자. 국회 검토보고서는 콘텐츠 사업자가 일반적으로 제공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며, 개별법 규율 필요성을 제기했다. 규모별 차등 적용은 중소 스튜디오·인디 창작자의 부담을 덜어주는 필수 안전장치다. 개인정보보호법·저작권법 등 기존 법제와의 중복도 피해야 한다.
기술적 실현가능성도 핵심이다. 캘리포니아주 AI 투명성법(SB 942)은 잠재 표식(latent)의 기계 판독 가능성·상호운용성을 강조하고, 월 100만 이용자 이상 대규모 제공자에 AI 탐지 도구(API) 무료 제공을 의무화했다. 국내도 가시 표시는 과도하지 않게, 대신 메타데이터·디지털 워터마크 등으로 사후 검증 가능성을 높이는 이중 레이어 표시를 표준화해야 한다. 업계의 워터마킹·로그·크레딧 공개 관행을 제도와 연계하면 이행 비용은 줄고 신뢰는 높아진다. 미디어 시장에서 필요 이상의 규제는 곧 경쟁력 상실이다.
현장 적용을 위해 정부는 표식 필수 항목(제공자·모델·버전·생성시각·고유식별자)만 최소로 정하고, 구현은 개방형 표준과 업계 자율에 맡기자. 플랫폼·스튜디오·개인 창작자가 함께 쓰는 경량 템플릿·자가점검표를 보급하고, 위반 제재는 고의·중과실 위주로 차등화하되 자율 시정(예:96시간)을 부여해 예측 가능성을 높이자. 민관이 베스트 프랙티스를 공개 공유하면 영세 사업자도 손쉽게 준수할 수 있다.
투명성은 신뢰의 기반이지만, 맥락을 무시한 일률주의는 창작을 질식시킨다. 맥락 기반 면제·수범자 명확화·기계 판독 표준·상호운용성·개별법 정합성이라는 다섯 축을 지키면 위험은 줄이고 속도는 살릴 수 있다. 넷플릭스·디즈니플러스 투자가 이어지는 지금, K콘텐츠의 도약을 가로막는 규제가 아닌 똑똑한 투명성으로 신뢰와 혁신의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창작의 회로를 끊지 않는 정교한 설계가 우리 산업의 다음 성장동력을 담보한다.
김용희 선문대 경영학과 교수 yhkim1981@sunmoon.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