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책이나 기본은 수다스럽다. 저자가 할 말이 그렇게 많지 않고서야 250쪽, 300쪽을 채우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문득 궁금해졌다. 저자조차 침묵하게 만드는 소재가 있다면 무엇일까? 가능성 있는 대상 하나가 떠오른다. 바로 음악이다.
한국 출판 시장을 둘러보면, 음악을 다룬 책은 드물다. ‘그거야말로 말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 아닐까?’ 감각 중에서도 특히 소리와 음악은 언어로 번역하기 어려운 존재다. 그래서 나는 말의 매체인 책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설명적인 시각 매체인 영화에 기대 보기로 했다. 어쩔 수 없다. 나는 클래식에 조예가 깊지 않지만, 음악을 다룬 영화는 즐겨 본다.
최근 라벨의 삶을 다룬 영화 <볼레로>가 개봉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좀 더 알아보고 싶지만, 라벨에 관한 책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신에 나는 동시대 인물이자, 더더욱 기이한 문제작가인 에릭 사티를 만나게 됐다. 그는 특이하게도 음악가이면서, 에세이로 자기 음악에 대한 육성 기록을 남긴 작곡가였다.
침묵의 작곡가, 에릭 사티
에릭 사티의 책 제목은 처음부터 농담처럼 들린다. 원제는 『A Mammal’s Notebook』(어느 포유류의 기록). 냉소적이고 특이한 인물이라고 들었던 나는, 당연히 자학 개그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읽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는 ‘음악가’라는 위상을 부인하며, 스스로를 동물과 사물, 침묵과 소음의 영역에 위치시켰다. 그의 작업은 인간 중심의 음악 언어에서 빠져나오는 일이었다. 사티는 이렇게 썼다.
“모든 사람들은 나에 대해 음악가가 아니라고 당신에게 말할 것이다. 맞는 말씀이다. 나의 작업은 전적으로 음도를 측정하는 일들이다. ‘별들의 아들’이나 ‘사라방드’ 중 그 어느 곡을 들어도, 이 작품들의 생성에 어떠한 음악적 영감도 작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곡들을 주도하는 것은 자연과학적 성격이다.더구나, 나는 소리를 듣는 데는 관심이 없고 소리의 측정에서 더한 즐거움을 찾는다. 한 손에 측음기를 들고 나는 즐겁고 확실하게 일한다.”
- 『사티, 에릭 사티』, ‘나의 존재’ 중에서
이런 태도는 <볼레로>에서 라벨이 공장의 기계음에서 음악적 아이디어를 얻는 장면과도 닮았다. 현대 예술은 아마도 ‘인간 중심의 휴머니즘’에서 벗어나는 데서부터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파괴적인 것이 서정적으로 바뀌다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는 오늘날 광고와 영화에서 서정적인 음악으로 널리 쓰인다. 하지만 그가 활동하던 당시, 이 느리고 단순한 음악은 비판의 대상이었다. 사티는 기존 음악의 ‘형태’를 파괴했지만, 새로운 서사나 클라이맥스를 제시하지도 않았다.
그의 음악은 반복하지 않고 극적이지 않으며 끝나지 않은 것처럼 들린다. 그는 ‘가구처럼’ 존재하는 배경음악을 제안했고, 이는 오늘날의 사운드 아트, 미니멀 음악, 앰비언트의 선구자적 실험으로 이어진다. 기계음조차 음악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그의 감각은 ‘포유류의 시선’으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여백은 우리 상상보다 클 수 있다
이런 음악은 오히려 듣는 사람에게 여백을 남긴다. 작가나 작곡가가 말하지 않음으로써, 각자가 해석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는 것이다. 발신자와 메시지가 넘치는 시대에, 바로 그런 예술이 가장 절실한 게 아닐까. 나는 이 지점에서 한국 예술가 중 이상을 떠올렸다. 언어를 가지고 언어를 해체한 시인. 시대를 앞서갔고 고독했다.
이상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모든 것이었다”고 말하는 듯하고, 사티는 “나는 아무것도 작곡하지 않지만, 그 안에 모든 것이 있다”는 태도로써 음악을 남겼다. 이들은 모두 스스로를 지움으로써, 세계를 드러내는 방식을 택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나를 사티와 이상에게 데려갔다.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방식은 각자 달랐지만, 결국 하나의 공통점으로 수렴된다. 자신을 지우는 방식으로 세계를 비추는 것. 그건 침묵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깊은 표현이었다.
정소연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