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적인 도시 폭격의 원조는 아돌프 히틀러다. 1937년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나치의 게르니카 공습에 한적한 소도시 주민 4분의 1이 사망했다. 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개발한 전투기와 폭탄 위력을 테스트하기 위해서였다. 분노한 피카소는 대작 ‘게르니카’로 전쟁과 인간의 광기를 고발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도시 공습은 전쟁의 일상이 됐다. 나치의 로테르담 공습에 4만 명, 런던 대공습에 6만 명이 운명을 달리했다. 연합군도 가만있지 않았다. 전쟁이 막판으로 치닫던 1945년 2월 독일의 드레스덴을 이틀간 폭격해 시가지 90% 이상을 파괴했다.
드레스덴 대폭격 한 달 뒤 미국은 도쿄 대공습을 전개했다. 수도를 초토화했는데도 버티자 결정적 카드를 꺼내 들었다. 80년 전 어제(8월 6일), 히로시마 상공 580m 지점에서 인류 최초의 실전용 원자폭탄 ‘리틀 보이’가 터졌다. 건물 70%와 인구 30%(7만~8만 명)가 일시에 사라졌다. 그 사흘 뒤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 팻맨이 투하됐다.
종전을 앞두고 굳이 도시를 날려야 했느냐는 비난이 적잖다. 일리가 없지 않지만 군국주의 일본의 무지와 광기가 자초한 측면이 크다. 승패가 완연해진 1945년 4월 1일 미국은 일본 본토 점령의 전초기지인 오키나와에 18만 명의 병력을 상륙시켰다. 승리했지만 과정은 악몽과도 같았다. 일본 대본영이 하달한 ‘1억 옥쇄 작전’ 때문이었다. ‘조국을 위해 벚꽃처럼 산화하라’는 주문에 수많은 소년병·민간인이 자폭 공격을 감행했다. 비이성적인 최후 발악은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원폭 결단으로 이어졌다. 미국은 히로시마를 폭격한 직후 ‘원자탄 사용’ 사실을 밝히고 항복을 통첩했지만 제국주의 군부는 끝까지 ‘신주불멸’(신의 나라 일본은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을 외쳤다. 결국 나가사키도 초토화를 면치 못했다.
히로시마 비극 80주년을 맞은 어제 푸틴의 러시아가 중거리핵전력조약(INF) 폐기를 발표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8년 전 트럼프 1기 때 미국의 선탈퇴로 흔들리기 시작한 INF 체제의 공식 종언이다. 스트롱맨들의 거침없는 행보가 또다시 인류의 대재앙으로 나타날까 갈수록 두려워진다.
백광엽 수석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