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복을 입은 두 남자가 공장 구석에서 소주를 마신다. 소주 박스 위에 대충 차려진 듯한 이 술상 위에는 빈 소주병 그리고 노가리 쪼가리들이 가득하다. 젊은 남자는 연신 나이가 든 남자의 눈치를 살핀다. 나이가 든 남자는 이 급조된 술자리가 마냥 좋기만 하다. 이 술상이 몇 년에 걸쳐 치러질 전쟁의 서막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소주전쟁>은 1990년대 말 외환위기 사태로 자금난에 시달리다 외국자본에 의해 파산당한 진로그룹의 실제 이야기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이야기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소주 브랜드 ‘국보’의 회장, 석진우(손현주)와 회사밖에 모르는 충직한 부하직원 표종록 이사(유해진)가 금융난에 처한 국보의 컨설팅을 자처하고 나선 외국계 투자회사 솔퀸과 만남을 개시하며 시작한다.
탐욕스럽고 어리석은 2대 회장 석진우는 무리한 확장으로 회사를 위기에 처하게 한 장본인이지만, 외국 회사와의 만남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자신하며 회사 기밀문서를 넘겨줄 것을 명령한다. 반면 신중하고 인정 많은 표 이사는 회장의 무리한 요구에도 최선을 다해 회사를 지키고자 백방으로 노력 중이다. 이 가운데를 매개하는 존재는 솔퀸의 한국인 직원 인범(이제훈)이다. 그는 컨설팅을 명목으로 국보에 접근해 헐값에 매각하려는 책략을 떠올린 장본인이자, 궁극적으로는 자기 수에 파멸하는 우화적 인물이다.
<소주전쟁>의 가장 큰 강점은 ‘소주’라는 아이템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외국회사의 직원들이 “도대체 대한민국에서 소주라는 존재의 막강함은 어디까지냐”라며 탄복하는 대목이 명시하듯 한국에서 절대적인 존재인 소주를 전면에 내세우는 영화라면 최소한으로 만들어도 중간이상은 가지 않을까 할 수 있겠지만, 결론은 그렇지 못하다. 영화는 소주라는 극강의 아이템을 중심 소재로 하고 있음에도 놀라운 만큼 올드한 클리셰의 반복(7년 전에 개봉한 <국가부도의 날>을 더 현대적으로 보이게 할 만큼)과 전형적인 캐릭터로 104분이라는 비교적 짧은 러닝타임까지도 지루하게 느껴지게 한다.
예를 들어 악덕 기업주와 그와 대비하는 충실한 직원, 그리고 부패한 법조인들의 향락 등이 기존의 한국 영화가 보여주었던 정확히 똑같은 방식으로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소주 회사의 총수인 석 회장이 고급 양주가 가득한 캐비닛에서 위스키를 꺼내어 표 이사에게 건네는 장면, 그리고 국보를 통해 이득을 얻으려는 자들이 모두 사무실에 위스키를 쟁여 놓고 마시는 대목을 클로즈업 하는 장면 등은 마치 국산 소주 캠페인을 재현하는 듯 구태의연하고 진부하다.
영화는 이야기적 설정들조차 마무리하거나 설명하지 못한 채 끝이 난다. 석 회장이 회삿돈을 횡령하여 표 이사 이름으로 세운 페이퍼 컴퍼니의 자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어떻게 표 이사는 이런 엄청난 범죄에 연루되었음에도 아무런 처벌 없이 해피 엔딩을 맞았는지. 궁극적으로 국보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영화임에도 파산 처리된 국보는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 (사실상 진로가 다시 국내 기업으로 합병된 것을 관객들이 알고 있다는 전제에도 말이다) 등, <소주전쟁>은 마치 이야기의 허리를 자르듯, 예상치 못한 대목에서 엔딩 크레딧을 올린다. 아마도 이 영화에서 가장 예상치 못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영화가 끝나는 엔딩 장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당황스러운 끝맺음이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 <소주전쟁>은 이미 감독의 표절과 이중계약 등의 이슈를 둘러싼 잡음이 많았던 영화다. 물론 영화가 만들어진 이후의 분쟁도 그 심각성이 적지 않으나 더 큰 문제는 이야기 자체의 방향성과 ‘질’로 보인다. 마치 2000년대 초반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진부함, 캐릭터의 전형성, 황당한 결말 등 영화는 창작자의 권리 분쟁에 앞서 이미 총체적이고도 원론적인 문제가 다수 존재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같은 날 개봉한 <하이파이브>와 비교했을 때 <소주전쟁>은 아마 실패한 전쟁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 유해진, 손현주, 최영준 등의 호연이 그 어느 때 보다 안타깝게 느껴진다.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
[영화 <소주전쟁> 캐릭터 예고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