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수레바퀴에 휩쓸리는 인간의 삶 다룬 발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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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亞초연작, 헝가리 세게드컨템퍼러리발레단 '카르미나 부라나'
2001년 초연 이래 24년동안 20만명 모은 화제작
부산국제무용제 통해 처음 공개

무대 위에 짚더미가 수북했다. 이곳에서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국은 다 부질없다는 얘길까. 무용수들의 생명력 넘치는 춤사위와 함께 지푸라기가 시종일관 흩날렸다. 지난 5일 부산 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 무대에 헝가리 세게드컨템퍼러리발레단의 '카르미나 부라나'가 올랐다. 부산국제무용제 개막 초청작으로 공연된 이 작품은 인간은 운명에 대해 예측할 수 없으며 인간이 감히 맞설 수 없는 존재라는 메시지를 70분에 걸쳐 전달했다.

운명의 수레바퀴에 휩쓸리는 인간의 삶 다룬 발레

작품의 서두와 종결부에 반복되는 유명한 곡 '오, 운명의 여신이여(O Fortuna)'는 운명의 수레바퀴가 끊임없이 돌며 인간의 삶을 결정짓는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날 무용수들은 운명의 힘과 인생의 덧없음 속에 자신들을 쉴새없이 내던졌다. '발레극'으로 부제를 붙인 이유를 가늠할 수 있었던 건 심리의 표현, 때때로 울려퍼지는 무용수들의 괴성 등 기존 발레와 차별화되는 지점이 꽤 많아서였다.

특히 힘찬 군무가 디스토피아적인 무대 연출과 대비되면서 극적인 효과가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관객의 시선은 비운을 타고난 한 젊은 여성에 꽂히게 된다. 고생할 팔자를 타고 난 여자는 강렬한 사랑을 맛보며 아주 잠깐 삶의 환희를 느낀다. 무용수의 몸짓은 희망을 나타내지만 잔혹한 운명은 그의 숨까지 앗아가버리며 남은 인간들에게 비극을 안겨준다.

운명의 수레바퀴에 휩쓸리는 인간의 삶 다룬 발레

'카르미나 부라나'는 삶의 전반을 이루는 불확실성을 안무로 다룬 '명상'과 같다. 작곡가 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는 합창곡 모음집(1937년 곡 초연)이다. 애초에 무용을 염두한 음악이 아니었지만 수많은 안무가들에게 영감을 줬다. 100년에 가까운 세월 속에서 카르미나 부라나는 다양한 무용단에 의해 여러 버전의 발레 작품으로 창작됐다. 레 그랑 발레 캐나디앵은 1966년 페르낭 놀트의 안무 버전을, 하트포드 발레는 1978년 에른스트 우토프의 안무로 이 작품을 올렸다. 이후 퍼시픽 노스웨스트 발레단의 켄트 스토웰이 1993년 자신만의 카르미나 부라나를 선보였다. 지금도 세계 수많은 발레단이 카르미나 부라나에 대한 재해석 버전을 레퍼토리로 갖추고 있고 꾸준히 공연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1994년 국립발레단과 국립합창단에 의해 페르낭 놀트 버전의 카르미나 부라나가 공연된 바 있다. 이 공연은 그해 평론가들이 꼽은 최우수 발레 작품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쇠창살에 꽂힌 백조가 자신을 가여워하는 합창곡에 맞춰 춤을 췄고 운명의 수레바퀴를 끄는 노예들의 몸짓을 잔상으로 남긴, 시대를 앞서간 대작이었다.

운명의 수레바퀴에 휩쓸리는 인간의 삶 다룬 발레

이번에 부산에서 아시아 최초로 초연된 세게드 컨템퍼러리발레단의 '카르미나 부라나'는 2001년 초연돼 24년간 유럽 각지를 돌며 400회 이상, 누적 관객 20만명을 모은 스테디 셀러라고 한다. 유럽 비평가들로부터 무용수들에게 스릴과 미학적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평가도 많이 받았다. 발레단의 안무가 터마시 유로니츠는 이날 공연에 앞서 가진 간담회를 통해 "발레단원들은 내러티브를 풀어내는 데 두려움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라며 "무용이란 '말'을 넘어서는 언어가 돼야 하고 그것이 안무를 보다 정교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고 설명했다. 그의 말처럼 작품은 유희나 오락의 영역을 가뿐히 뛰어넘어 더 깊은 무언가를 전달하려는 노력이 역력했다.

모든 장면에서 생기는 긴장감이 금세 관객에 전이됐다. 마지막 장면에서 수직으로 매달렸던 사슬이 하나둘씩 마찰음을 내며 무대위로 떨어질 때, 운명의 속박을 끊어내는 건 결국 죽음 뿐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해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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