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응을 요구하는 세상에서 필요한 건 '거절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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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계 유대인이면서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아무런 생각 없이 절대적 권력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경고했다.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나치 전범들이 악마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착하고 성실한 사람들이었다는 주장은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우리는 다시 한번 ‘악의 평범성’을 경험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명령에 복종한 사람들이 저지른 행위로 안온했던 일상이 무너졌다.

순응을 요구하는 세상에서 필요한 건 ‘거절의 힘’

순종이 미덕이고 침묵이 금처럼 여겨지던 시대는 지나갔다. 영국에서 화제인 책 <거절의 힘(Defy)>은 ‘예스(Yes)’만을 강요하는 시대에 ‘노(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소개한다.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심리적 압박이 왜 생기는지 알려주면서, 순응을 요구하는 세상에 맞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거절을 훈련할 때 개인과 사회에 어떤 긍정적인 변화가 생길 수 있는지 보여준다. 영국 의사 출신으로 현재는 조직 심리학자로 활동하면서 심리학, 행동과학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이끌어내고 있는 저자 수니타 사는 자신의 경험과 주변의 사례들, 그리고 다양한 과학 논문들을 결합해 우리 삶 가운데 거절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반대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분명한 이유는 반대하지 않아 발생했던 불미스러운 사건을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책은 미국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2020년 5월 25일, 미네소타 미니애폴리스의 한 편의점에서 위조지폐가 사용됐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은 인근에 있던 흑인 플로이드를 체포했고, 그 과정에서 백인 경찰 데릭 쇼빈은 9분 29초 동안 왼쪽 무릎으로 플로이드의 목을 짓눌렀다. 의식을 잃은 플로이드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사망했다. 당시 플로이드의 목을 짓누른 경찰 주변에는 동료 경찰 3명이 더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의식을 잃어가는 혐의자를 가만히 지켜봤다. 동료 경찰들의 무력한 순응 또는 방조가 억울한 죽음을 유발했고, 그 사건으로 미국 전역에 시위가 확산했다.

응급실에서 무력하게 수련의의 지시를 따라야만 했던 저자 자신의 이야기도 인상 깊다. 갑작스러운 가슴 통증으로 응급실을 찾은 저자는 별다른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고, 이내 통증도 잦아들었다. 퇴원해도 되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하얀 가운을 입은 수련의가 찾아와 폐색전증이 의심된다며 CT 촬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이 의사로서 가슴 통증이 폐색전증의 전형적인 증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엑스레이의 70배에 해당하는 방사선에 노출되는 CT 촬영을 할 이유가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저자는 결국 ‘하얀 가운’의 권위에 굴복하고 촬영실 침상 위에 누울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순응하면서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삶이라고 배웠다. 동의하기 싫고 반대하고 싶지만, 결국 말을 삼키고, 고개를 저으며, 대세를 따르며 살아왔다.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순응 압박에 익숙해져 지내는 동안 세상은 점점 더 엉망이 됐다. 책은 거절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잠시 멈춤의 기술’을 가르쳐주면서, 저항 훈련을 통해 뇌 신경망을 새롭게 세팅하고, 자신의 인생과 세상을 바꿔보자고 제안한다.

홍순철 BC에이전시 대표, 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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