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서 발생한 초등학생 살인사건의 가해자가 정신질환 이력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정신 건강 관리의 중요성이 다시 한번 강조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는 경기 침체, 고용 불안, 직장 내 스트레스, 개인적인 사유 등으로 정신 건강 문제를 겪는 국민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3분이면 마감돼요"…정신과도 오픈런 시대
정신 건강 문제를 겪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인기 있는 정신과는 매월 초 티켓팅으로 선착순 마감되거나 초진 환자 기준 최대 한 달 이상 기다려야 하는 상황도 벌어지고 있다.
서울 마포구 소재의 한 정신과 관계자는 "원래 매월 1일 네이버 예약을 통해 선착순으로 사람을 받았지만, 지금은 홈페이지 구글 폼을 통해 신청서를 받고 있다"며 "작성 후 일자대로 최대 3주~5주 안으로 연락 후 예약이 진행되며 지금 못해도 20~30명이 넘는 환자가 대기 중이다"고 말했다.
경기도 용인의 한 정신과의원 직원은 "매달 초 링크를 통해 초진 진료 예약을 선착순으로 받고 있는데 못해도 3~5분 이내에 마감이 된다"며 "달마다 받는 인원이 다른데 2월 같은 경우 30명 정도 받았고 오전에 받을 수 있는 초진 환자는 최대 2명"이라고 설명했다.
2022년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최근 국내 우울증 등 정신 질환을 호소하는 환자 수가 100만 명을 돌파했으며 인구 10만 명당 주요 우울 장애로 치료받은 환자 수는 2189명으로 보고됐다.
13일 오전 11시께 기자가 서울 영등포구 소재 유명 정신과를 방문해보니 오전 시간임에도 진료를 위해 대기하는 환자들이 의자에 줄줄이 앉아 있었다.
취업 준비생 A(29)씨는 "최근 취업 스트레스 때문에 불안과 강박장애가 의심돼 병원을 방문했다"며 "이 병원 말고 서울 상암에 위치한 병원도 주변 사람들을 통해 추천받았는데 환자가 너무 많이 대표 원장이 당분간 초진 환자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고 설명했다.
'전 국민 마음 투자 사업' 소득수준 따라 최대 8회, 8만원 지원
정부는 국민정신 건강을 국가 차원에서 지원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인식해 지난해 7월부터 '전국민 마음 투자 지원사업'을 시작했다. 올해로 시행 2년 차를 맞은 '전 국민 마음 투자 지원사업'은 우울·불안 등 정서적 어려움으로 인해 심리상담이 필요한 국민에게 전문 심리상담 바우처를 제공하는 서비스다.
이 사업은 시행 초기 8만 명을 대상으로 시작해 점차 지원 규모를 확대하고 있다. 정부는 2027년까지 50만 명 이상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이를 통해 국민정신 건강을 개선하고, 장기적으로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특히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사회초년생, 저소득층, 고위험군 등을 우선으로 지원해 정신 건강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대상자는 나이 및 소득 기준 없이 정신과 전문의의 소견서를 받은 국민이다. 총전문 심리상담 서비스 횟수는 8회다.
신청 방법은 주민등록상 또는 실거주지 읍·면·동 행정복지센터를 직접 방문하거나 만 19세 이상에 한해 온라인으로 신청할 수 있다. 현재 정신 건강 상태에 따라 1급과 2급 유형으로 나뉘며 바우처 카드를 통해 각각 최대 8만원, 7만원가량의 비용을 지원받을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일회성으로 소견서를 받을 수는 없고 최소 4주~6개월 정도의 진료 기록이어야 하고 담당 의사의 진단에 따라 전 국민 마음 투자 지원 사업 대상자로 판단되면 소견서가 나가고 있다"며 "지원을 받으시는 분들은 본인 부담금을 2~3만원 정도만 내고 받고 있다"고 말했다.
"비싸서 못 받았는데…다시 찾을 일상 기대돼"
이러한 서비스의 활용을 고려하는 사례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가족을 떠나보낸 충격으로 극심한 우울과 공황을 겪고 정신과를 찾았는 B씨(27)는 약물 치료 후 취업했지만, 높은 업무 강도와 낯선 환경에 최근 다시 증상이 악화됐다.
하지만 사회초년생에게 1회에 10만원을 호가하는 상담 비용은 큰 부담이었다. 고민 끝에 의사에게 털어놓았고 '전국민 마음 투자 지원사업' 추천받아 상담받을 수 있게 됐다.
곧 신청을 앞둔 A씨는 오랜 시간 홀로 감당해온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다시 건강한 일상을 되찾기를 기대하고 있다.
불규칙한 업무 시간으로 인해 최근 공황 증세를 느꼈다는 방송국 PD C씨는 "친구에게 이 서비스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현재 맡은 프로그램 이번 주 회차의 수정과 최종 시사가 끝나면 한번 병원에 찾아가 볼 계획"이라며 "주변 PD 선후배들도 적지 않게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데 꼭 소개해 주고 싶다"고 말했다.
치료받기 위한 노력 반드시 필요…사회 인식 개선도 함께 가야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사회적 편견이 두려워 치료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립정신건강센터에서 발표한 '2024년 국민 정신건강 지식 및 태도' 조사에 따르면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거나 정신과 진료를 받으면 취업 등 사회생활에 불이익을 받을 것이다'라는 응답이 2022년 3.61에서 2024년 3.73으로 증가했다.
전문가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료받기 위한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입을 모야 강조했다. 이와 함께 정신 건강 치료를 원활하게 받기 위해서는 사회 인식과 회사 환경의 개선이 함께 가야 한다고 조언한다.
차승민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대전 사건처럼 이러한 일이 발생하면 기존 환자들이 더더욱 치료를 기피하는 경우가 있는데 참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 속으로 곪는 문제기 때문에 치료를 잘 받아야 한다"며 정신 질환은 개인의 의지가 아닌 마음의 질환이기 때문에 꾸준한 관리가 필요하며 각 회사나 단체에서도 환자들이 편안하게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정신 건강 복지의 범위를 상담에만 국한하지 않고 더 넓은 범위로 지원할 수 있도록 제도를 확장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병철 한림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어떤 이들은 상담보다 약물이 더 효과가 있는 경우가 있고 때에 따라 상담 치료까지는 필요 없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환자들이 바우처 사업의 재원을 다 소모해 버리는 경향들이 존재한다"며 "그런 경우 이런 좋은 사업들이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이 보완되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전했다.
유지희 한경닷컴 기자 keeph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