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1950년대생 화가 중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 데이비드 살레(73)를 두고 하는 말들이다. 젊은 나이에 성공을 거두는 화가는 드물다. 평생에 걸쳐 발전을 거듭하며 그 성공을 계속 유지하는 화가는 미술사 전체를 통틀어도 그리 많지 않다. 살레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낸 작가다.
20대에 미술계에 뛰어든 살레는 뉴욕 휘트니미술관에서 34세때 사상 최연소로 회고전을 열며 일찌감치 ‘전설’의 반열에 올랐고, 그 후로도 줄곧 현대미술계의 중심에서 예술적·상업적 성공의 길을 걸어왔다. 그의 작품은 오스트리아 빈 알베르티나 미술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구겐하임 등 전 세계 주요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사진, 예술 비평, 무대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를 누비는 그를 사람들은 ‘예술가들의 예술가’라고 부른다.
서울 한남동 현대카드 스토리지에서 9월 7일까지 열리는 살레의 전시 ‘언더 원 루프’는 지난 50년에 걸친 그의 작품세계 전체를 조망하는 전시. 그를 유명하게 만든 초기작부터 신작 ‘윈도우 시리즈’와 함께 애니메이션 형태로 만든 작품까지 한눈에 둘러볼 수 있는 드문 기회다. 전시 개막에 앞서 살레를 만나 작품의 의미는 무엇인지, 어떻게 감상하면 좋을지를 물었다. 예술을 쉽게 설명하는 작가이자 달변가로도 이름난 작가답게 유려한 답변이 돌아왔다.
▷전시 1부에는 당신의 초기작이 나와 있습니다. 이 작품들은 뭘 뜻하나요.
“한마디로 설명할 수는 없어요. 그게 현대미술의 특징이니까요. 물론 사람들은 그림을 보며 ‘이건 이런 뜻이야’라고 명쾌한 결론을 내리고 싶어해요. 그게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래서 광고나 대중문화는 단순하고 직관적인 이미지를 보여줘요. 하지만 현대미술 작가들은 일부러 작품의 구조와 의미를 복잡하게 만듭니다. 관객이 천천히 그림을 감상하고 그 안에서 스스로 복잡하고 깊이 있는 이야기를 발견하기를 원하니까요. 이건 순수예술과 대중문화의 중요한 차이 중 하나입니다. 제 작품도 그렇습니다. 작품에 여러 개의 요소를 동시에 넣어서 다양한 해석을 유도하고, 이 요소가 결합해 음악의 화음처럼 아름다워지도록 구성했습니다.”
▷이런 작품들은 어떻게 봐야 합니까.
“찬찬히 들여다보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찾으세요. 너무 빠르게 ‘이 그림은 이런 뜻’이라고 판단하지는 마세요. 누군가를 대할 때도 그 사람을 너무 쉽게 단정지으면 안 되는 것처럼요.”
▷반면 2부의 ‘트리 오브 라이프’ 연작은 명확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야기를 담고 있긴 해도, 정해진 해석이나 뚜렷한 결말이 없다는 점은 1부 작품과 똑같아요. 같은 그림을 두고 동시에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것. 그게 미술의 장점이자 흥미로운 점이지요.”
▷아파트 창문 너머의 다양한 사람들을 그린 ‘윈도우 시리즈’는 어떤 의미인가요.
“이렇게 설명해 볼게요. 도시를 걷고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길을 따라 걷고 있는데, 옆에는 아파트 건물이 있고 각각의 창 너머로 다양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고립된 공간에 있으면서도, 함께 존재한다는 그 감각. 그 감각을 그림으로 만든 작품입니다. 회화만라는 장르의 ‘동시에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는 특징을 직관적으로 표현한 거지요. ‘동시성’은 제 작품과 미학을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동시성이란 건 우리 삶에 있어 어떤 의미인가요.
“정말 좋은 작품에는 항상 두 가지가 나란히 존재합니다. 강한 재치(wit)와 깊은 슬픔(melancholy). 이런 상반되는 감정을 동시에 느끼게 해서 ‘지금 이 순간’이 다양한 요소를 함께 품고 있음을,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유일무이한 시간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얼마나 경이로운지를 일깨워주는 게 그림의 역할이고 본질입니다. 그건 우리가 그림을 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움직이는 애니메이션 작품들도 나왔습니다.
“옛날부터 제 그림을 한번 움직이게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이번 기회에 실천으로 옮길 수 있었습니다. 애니메이션은 시선을 사로잡는 유쾌한 장르에요. 하지만 한계도 있습니다. 항상 정해진 방식으로만 움직이니까요. 반면 그림은 그 자체로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보는 이의 마음 속에서는 늘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지요. 그래서 그림은 절대 ‘소진’되지 않아요. 물리학 용어 중에 잠재 에너지라는 개념이 있잖아요. 움직이지 않고 있지만 언제든 움직일 수 있는 힘. 회화는 그 에너지를 갖고 있어요. 그래서 그림은 열려 있는 매체입니다.”
▷당신의 삶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일부러 피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건 별로 특별하지도, 재미있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자라온 환경과 문화, 그리고 그 안에서 접해온 것들에 의해 형성된 존재잖아요. 어디서 뭘 했는지보다 중요한 건 그 경험들에 ‘내가 어떻게 반응했는가’예요. 그 ‘반응’은 제 작품에 드러나 있습니다. 그걸 보면 되죠. 제가 겪은 일을 따로 말해야 한다면 별로 재미 없을 거예요.”
▷일찍 성공을 거둔 비결이 궁금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명확하게 하나하나 짚어서 나열하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타이밍이었어요. 당시는 순수예술과 시각문화가 주류 미디어의 관심을 막 받기 시작한 시기였거든요. 저는 딱 맞는 시간과 장소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공이 갑작스럽게 찾아왔다고 느끼진 않았어요. 나이는 어렸지만 이미 꽤 오랫동안 깊이 있게 작업을 해왔거든요. 세상에 보여줄 만한 걸 갖고 있었다는 얘기죠.”
▷성공을 꿈꾸는 젊은 작가들에게는 뭐라고 조언해주고 싶으신가요.
“19세기 프랑스 작가인 기 드 모파상의 일화가 떠오릅니다. 모파상은 젊은 작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네 안에서 너만의 것을 찾아내는 거야.’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만약 그게 없다면, 당장 밖에 나가서 어떻게든 구해 와!’ 저도 같은 조언을 하고 싶네요.”
▷서울은 당신에게 어떤 도시로 느껴지나요.
“마치 뉴욕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리와 사무실, 식당을 비롯해 어디에서나 느껴지는 그 엄청난 에너지와 활력.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 ‘아, 낯설지 않다’는 느낌. 도쿄나 파리 같은 도시에서 느낀 감정과는 분명히 달랐어요.”
▷한국에서 신작을 발표하기로 한 것도 그래서였나요.
“분명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한국은 기술이 발전한 나라고, 예술에 관심을 갖는 호기심 많은 젊은이나 세련된 사람들이 많지요. 신작을 발표하기에 괜찮은 장소입니다. 하지만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테드)과의 우정이 더 크게 작용했습니다. 테드는 저를 초대해 전시를 열고 싶어했고, 그게 마침 신작이 완성되는 시점과 맞물렸어요.”
▷현대카드는 당신을 ‘거장’으로 소개했습니다. 동의하시나요.
“영광이지만 별로 중요하진 않아요. 하지만 다른 분야와 달리 예술은 경쟁이 아니고, ‘최고’라는 개념도 없으니까요. 그냥 어떤 작가를 더 좋아하고 덜 좋아하고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의 그런 선호는 시간과 장소, 문화권, 유행에 따라 언제든지 바뀔 수 있어요. 중요한 건 누가 ‘진짜로 의미 있는 것’을 만들었는지에요.”
▷예를 들면요.
“저는 1970년대 초 미술학교를 다녔는데, 1973년에 피카소가 세상을 떠났어요. 당시 충격이 컸을 거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저를 비롯한 학생들은 정말이지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황소 그림 그리던 고리타분한 노인이 죽었는데, 그게 뭐?’라고 여겼지요.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어요. 피카소는 1920~1940년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였고, 수십년간 저평가를 받긴 했지만, 1980~1990년대를 지나며 다시 중요한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타이틀이나 명성이라는 건 그렇게 쉽게 바뀌는 무의미한 거에요.”
▷그렇다면 우리는 좋은 작품을 어떻게 알아봐야 할까요.
“여러분만의 감각과 지성을 믿고, 그냥 ‘보세요’. 그것만으로도 생각보다 훨씬 많은 걸 알 수 있어요. 말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해도, 뭔가를 느낀다는 건 분명합니다. 그건 제가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그림을 직접 보고 ‘지금 내가 뭘 느끼고 있는 걸까?’ 하고 스스로 물어보세요. 그리고 그 때 떠오른 생각은 아마 틀리지 않았을 겁니다.”
성수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