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선희]텍스트힙 시대 얇아진 책… 일상에 스며드는 독서

20 hours ago 6

박선희 문화부 차장

박선희 문화부 차장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가 선비 집안의 예절과 문화를 고찰한 ‘사소절’에는 책을 다루는 우리 선조들의 엄격한 자세가 잘 드러난다. 스스로를 ‘간서치(看書痴·책만 보는 바보)’라 칭했을 정도로 책을 좋아했던 그는 “그냥 대충 보아 넘기고 나서 널리 보고 많이 읽었다며 떠벌리고 다녀선 안 된다”고 지적 허세를 경계하는 한편, 서적 자체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에 대해서도 꼼꼼히 언급하는데 뜨끔한 부분이 많다.

“책을 읽을 때는 손가락에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기지 말라. 손톱으로 줄을 긋지도 말고…베지도 말고, 팔꿈치로 괴지도 말라…청소하는 곳에서는 책을 펴보지도 말라. 책을 던지지 말고, 심지를 돋우거나 머리를 긁은 손가락으로는 책장을 넘길 생각도 하지 말라.”

본받을 만한 깔끔한 습관이긴 하지만, 이 기준에 비춰 보면 현대인 중 누구도 제대로 된 지식인이라고 하긴 어려운 것 아닌가 싶다. 연간 국내에서 발행되는 신간 종수가 6만 종이 넘는 시대, 책의 물성 자체를 이렇게 신성시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한국인들이 심리적으로는 여전히 이덕무가 경고한 것 이상으로 책을 조심스럽게 대하는 것 같다. 성인 평균 독서율이 연간 세 권 정도, 10명 중 6명이 한 해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한국의 낮은 독서율을 살펴보면, 독서란 행위는 친근한 일상이라기보다는 큰 마음먹고 하는 연례의식처럼 비장하게 느껴진다.

최근 서점가에선 가볍게 넘겨 볼 수 있는 얇고 작은 책들이 연이어 출간되고 있다. 경장편 시리즈가 늘기 시작하더니 이젠 ‘위픽 시리즈’ ‘달달북다’처럼 단편소설 하나만 갖고 단행본으로 만들어 내는 시리즈까지 여럿 생겼다. 몇 년에 걸쳐 쓴 단편소설 예닐곱 편은 모아야 책 한 권이 된다고 생각했던 예전 기준으로 보면 파격이다. 월별로 새로 나오는 에세이 시리즈 ‘시의적절’ 같은 것도 있다. 제철 음식처럼, 책도 제철 읽을거리를 즐기란 뜻이란다. 책과 잡지의 하이브리드 같다.

호흡과 순환주기가 짧고 가벼운 이런 책들을 두고 일각에선 숏폼에 익숙해져 책을 안 읽는 영상세대를 잡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요즘 젊은 독자를 겨냥해 얇아지는 책들은 단순히 책의 크기와 두께가 줄어든 것만이 아니라 ‘책이라면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도 같이 깬다는 점에서 눈길이 간다.

국민독서 실태조사에 따르면 책을 가까이하기 어려운 이유 중 ‘일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24.4%)만큼 많은 것이 ‘책 이외 매체(스마트폰·텔레비전·영화·게임 등) 때문’(23.4%)이었다. 독서란 행위 자체가 능동적인 사고를 요구하긴 하지만, 책 읽는 게 다른 콘텐츠와는 달리 ‘각 잡고’ 해야 하는 특별한 일처럼 느껴지면 책을 고르는 것도, 읽는 것도 더 어렵게 된다. 어떤 계기로든 읽는 즐거움을 누려본 사람들이 자발적인 독서, 깊이 있는 독서의 세계로 나아간다. 텍스트힙이 유행하며 등장하는 얇은 책들이 독서를 일상에 스며들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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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희 문화부 차장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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