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부터 분단까지…근현대 미술 거장을 만나다

2 days ago 8

미술은 그 시대의 얼굴을 닮는다. 태동부터 현대미술에 바통을 넘겨주기 전까지, 한국 근대미술은 변혁의 시간으로 요약된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해방, 전쟁과 분단이라는 커다란 격동의 역사를 거쳤기 때문이다. 붕괴하는 전통과 밀려드는 모더니즘 사이에서 갈등하면서도 나름의 정체성을 모색한 이 시기는 ‘미술가’라는 자각이 생긴 때이기도 하다.

경기 과천시 막계동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는 ‘한국근현대미술 Ⅰ’은 21세기 들어 국제 미술시장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회화가 발아한 순간을 눈에 담는 전시다. 과천관이 5년 만에 선보이는 상설전이다. 전시는 총 9부로 이뤄졌고 채용신, 임군홍, 오지호, 이응노, 이중섭, 장욱진, 김기창, 박래현 등 한국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화가 70명의 작품 145점을 한데 모았다.

임군홍이 중국 베이징 자금성 풍광을 그린 ‘고궁’. 따뜻한 색감과 부드러운 표현이 마치 서양 인상주의 풍경화처럼 해 질 녘의 분위기를 잘 나타낸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임군홍이 중국 베이징 자금성 풍광을 그린 ‘고궁’. 따뜻한 색감과 부드러운 표현이 마치 서양 인상주의 풍경화처럼 해 질 녘의 분위기를 잘 나타낸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한국에서 근대미술은 구한말 개화기와 대한제국으로 이어지는 근대적 지식체계를 받아들이는 시기와 궤를 같이한다. 전통 서화와 화공의 개념을 대체하는 회화와 미술가라는 개념이 등장한 때다. 전시 1~3부가 이에 해당한다. 1부 ‘새로운 시선의 등장’은 조선 후기 영선사, 관비 유학 등의 제도로 유입된 현미경, 망원경, 카메라 같은 신문물을 통해 사실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관찰하며 탄생한 작품들이 소개돼 있다. 채용신의 ‘허유, 유인명 초상’(1924~1925), 김은호의 ‘순종황제 인물상’(1923) 등 실제 사진을 토대로 그려진 작품들은 조선 중기 인물화와 달리 세밀하고 사실적인 얼굴을 표현했다.

3부 ‘미술/미술가 개념의 등장’에선 일본 유학을 통해 유화를 비롯한 서양 미술사조를 접하며 처음으로 ‘미술가’라는 자각을 가졌던 작가들의 작품이 걸렸다. 신여성의 표상인 나혜석부터 정물화 대가인 도상봉 등 1세대 서양화가들이다. 나상윤의 ‘누드’(1927)는 해부학에 기초한 인체 표현을 접하게 되며 그리게 된 회화라 새롭다. 서양의 미술사조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당대 화가들의 재해석도 돋보인다. 근대 화가들은 일제강점기를 살며 전통을 부정하도록 강요받는 환경에서도 그림의 뿌리를 잊지 않았다. 5부 ‘조선의 삶을 그리다’는 1930~1940년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자주 다뤘던 초가집, 장독대, 기생 등의 소재를 그린 작품들이 걸려 있다.

8부 ‘폐허 위에서: 가족을 그리며’는 식민 지배와 전쟁, 분단 등의 역사적 아픔 속에서 치유의 원동력으로 ‘가족’을 제시했던 거장들의 작품으로 채워졌다. 수유 중인 어머니와 아기를 표현한 변영원의 ‘모자’(1945), 어린 손주를 등 뒤에서 감싸 안은 박수근의 ‘할아버지와 손자’(1960)는 든든하고 따뜻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시 관람 포인트는 걸음을 옮기다 보면 만나게 되는 세 곳의 ‘작가의 방’이다. 한국 근대미술에 족적을 남긴 특정 작가를 집중 조명하는 공간이다. 1년 단위로 교체되는데, 처음 이 방을 장식한 작가는 한국적 인상주의의 선구자인 오지호, 부부 화가 박래현과 김기창,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중 한 명인 이중섭이다. 이중섭 방에선 ‘황소’(1950년대), ‘흰소’(1950) 등 대표작은 물론 ‘시인 구상의 가족’(1955) 등 미술관의 새 소장품도 만나볼 수 있다.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현대미술 하이라이트’와 짝을 이루는 전시다. 서울관이 1960~2010년대 동시대 미술을 움직여온 작가들의 작품을 모은 만큼 과천관에 먼저 들르는 게 좋다. 다음달 26일에는 ‘한국근현대미술 Ⅱ’가 열린다.

유승목 기자 mok@hankyung.com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