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지휘자, 20대에 최정상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천재 마에스트로’ 클라우스 메켈레(29). 현재 파리 오케스트라와 오슬로 필하모닉을 이끄는 그는 2027년부터 로열콘세르트헤바우오케스트라(RCO), 시카코 심포니 오케스트라(CSO)의 수석지휘자 자리에 오른다. 올해는 오는 13~15일 파리오케스트라와 내한한 뒤 11월 RCO와 함께 네 차례 공연으로 한국 관객을 만난다.
관록의 노장이 즐비한 클래식 음악계에서 전례 없는 서사를 쓰고 있는 메켈레를 한국경제신문 아르떼가 국내 언론 최초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직접 만났다. 지난달 열린 ‘말러 페스티벌’로 가장 바쁜 시간을 보낼 때였다. ‘말러 교향곡 8번’ 공연을 앞두고 3시간에 가까운 리허설을 마친 메켈레는 공연 전 대기 공간인 그린룸에서 기자를 맞이했다. 그의 얼굴엔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리허설 전보다 더 밝은 에너지로 가득했다. 자유로움마저 느껴졌다.
“저에게 공연은 실제보다 훨씬 이전에 시작돼요. 시간을 쪼개 작품을 공부하고, 악단을 준비하는 과정이죠. 공연하는 순간에는 오히려 제 자신을 자유롭게 내버려둡니다. 자유란 곡을 완벽히 이해했을 때 가능해요. 항상 자유로워지는 건 의미가 없으니까요.”
◇“세계 최고의 RCO…약혼한 느낌 ”
그는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직업적 정상에 올랐다. 1996년생인 그가 세간에 이름을 알린 순간은 2017년 9월 스웨덴 방송교향악단의 객원 지휘자를 맡았을 때다. 메켈레의 잠재력을 알아본 이 악단은 첫 공연 후 3개월 만에 그에게 수석객원지휘자란 새 직함을 주기로 했다. 악단들이 줄줄이 메켈레에게 빠지게 되는 역사의 서막이었다. 다음 해 메켈레를 객원지휘자로 부른 오슬로 필하모닉도 마찬가지였다. 객원 초청 5개월 만에 수석지휘자 겸 음악감독 자리를 제안했다. 2020년부터 3년간 맡는 자리였지만 오슬로 필하모닉은 2027년까지로 계약을 4년 더 연장했다.
지휘 천재의 등장은 서유럽에서도 뉴스거리였다. 2019년 6월 객원지휘자로 온 메켈레와 합을 맞춘 파리 오케스트라도 그에게 매료됐다. 2022년부터 5년간 음악감독 자리를 제안했다가 2021년에 시작하는 것으로 앞당겼다. “메켈레와 일하려면 하루라도 빨리 움직여야 한다”는 이야기가 업계에 공공연히 퍼졌다.
이때 파격적인 승부수를 띄운 건 RCO였다. 이 악단은 2022년 메켈레에게 2027년부터 5년 임기로 수석지휘자 자리를 제안했다. 그 이전 5년간은 ‘예술 파트너’란 직함을 새로 만들어 붙이기로 했다. 예술 파트너는 매년 최소 5주간, 수석지휘자는 최소 12주간 악단을 지휘해야 한다. 메켈레는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자리도 2027년부터 5년간 함께 맡는다. 이 정도로 젊은 나이에 두각을 나타낸 지휘자는 스물여섯 살에 독일 아헨 극장 총감독에 오른 카라얀 정도다.
“RCO는 의심의 여지 없이 세계 최고 오케스트라입니다. 이들의 아름다운 소리는 저를 항상 감동시켜요. 따뜻하면서도 투명한 소리인데, 깊은 울림을 주면서도 빛으로 가득 찬 소리랄까요. 저와 RCO는 5년 전 처음 만났는데, 그 순간부터 함께 성장해왔어요. 지금은 서로를 편안하게 생각하는 관계로, 마치 약혼한 것 같은 느낌이에요.(웃음)”
137년 역사의 RCO에는 그동안 마리스 얀손스,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같은 뛰어난 수석 지휘자가 거쳐갔다. 메켈레는 “400년에 걸친 시대의 음악을 연주하는 만큼 RCO의 역사적인 소리를 보존하면서 동시에 유연성을 확보해 나가고 싶다”고 했다. 그는 세계 최고의 음향을 들려주는 RCO의 전용 공연장 콘세르트헤바우의 이야기를 할 땐 사뭇 진지한 표정이 됐다.
“훌륭한 공연장은 그 자체로 악기이고, 콘세르트헤바우는 바로 그런 장소죠. 수많은 지휘자가 걸었을 공연장의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역사의 무게를 느낍니다.”(RCO의 주 공연장은 지휘자가 무대에 등장하고 퇴장할 때 무대와 객석 사이로 연결된 붉은 카페트의 계단을 사용한다.)
◇예술가 집안, 핀란드 지휘자의 DNA
메켈레는 첼리스트인 아버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할아버지는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다뤘다. 여동생은 발레리나다. 메켈레도 첼로로 음악을 시작했다. 지금도 메켈레는 친구들과 실내악을 종종 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지휘봉을 잡게 된 데는 열두 살 때 핀란드의 전설적 지휘자 요르마 파눌라에게 지도를 받는 행운이 있었다. 파눌라는 핀란드 클래식 음악의 산실인 시벨리우스 음악원에서 20년 넘게 후학을 양성했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음악감독이던 오스모 벤스케, KBS교향악단의 음악감독이던 피에타리 잉키넨이 그의 제자들이다.
메켈레의 지휘 스타일에서도 핀란드 지휘자들의 개성으로 꼽히는 ‘절제와 깊이’를 찾아볼 수 있다. 메켈레는 감정에 과잉 몰입하기보다 소리를 섬세하게 다듬어 정서적 밀도를 드러내는 데 집중한다. 단원들과 소통할 때는 온화한 리더십을 발휘한다. 다그치기보다 간명한 표현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고, 스스럼없이 연주자들과 어울린다. 뚜렷한 주관으로 음악을 해석할 땐 담대한 리더십이 빛난다. 시원시원하게 소통하면서도 기존 거장들과의 비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지휘에 빠지게 한 곡은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이었어요. 일곱 살 때였죠.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고, 그때부터 줄곧 지휘자를 꿈꿨습니다.”
메켈레를 이야기할 때 핀란드 작곡가 시벨리우스를 빼놓을 수 없다. 첫 앨범으로 ‘시벨리우스’를 발매했고, 열두 살에 시벨리우스 음악원에 들어가 지휘 스승을 만났다. “시벨리우스는 자신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경험한 것 같습니다. 유럽, 특히 빈에 있을 때는 스스로 독일인처럼 느꼈다고 하고 핀란드에 가면 다시 중앙 유럽인이 되고요. 그 점은 저도 마찬가지죠. 속하는 곳에서 항상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니까요. 작품의 발전 과정을 유심히 보면 구스타브 말러와의 유사성도 있습니다. 핀란드만의 정체성은 초기 작품에서 많이 드러나는데 자연, 평화, 청년의 시선을 바라본 ‘열정’이 아닌가 싶어요.”
◇“아마추어 사진작가…일상을 담는다”
메켈레는 지난해에만 113번 무대에 올랐다. 사흘에 한 번꼴로 연주한 셈이다. 악보뿐 아니라 작곡가의 삶까지 탐구하는 데 이 정도의 스케줄을 소화해내고 있는 그에게 가장 큰 영감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
“음악에는 나이가 없다고 생각해요. 물론 무대 위에 젊은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 영향력을 낮춰볼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주 젊은 사람들이 만든 녹음을 듣다가도, 옛 거장들의 녹음을 찾아 듣습니다. 중요한 건 품질이지, 나이와는 상관 없는 것 같아요. 지휘자에게 가장 중요한 건 집중이잖아요. 제게 루틴이라고 할 만한 건 콘서트 전에 바나나 한두 개를 먹는 일뿐이에요. 물도 충분히 마시고, 그런 다음 집중만 하면 돼요.”
그에겐 악보를 보지 않는 시간에 즐기는 취미가 있다. 스스로를 “아마추어 사진작가”라고 말하며 웃었다.
“몇 년 전에 함부르크에서 라이카 카메라를 샀는데, 그 카메라를 어디에서든 갖고 다니며 일기 쓰듯 사진을 찍어요. 가끔 비행기에 오래 있을 때 사진을 쭉 살펴보는데, 아주 행복해요. 풍경뿐 아니라 인물, 길가 등의 사진을 찍어요. 단순하고 일상적인 소재이지만, 저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거든요.”
2023년 오슬로필하모닉과의 내한 이후 오랜만에 한국 무대에 서는 기대감도 감추지 않았다. “한국은 개인적으로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낸 곳이어서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특히 RCO와의 내한에선 악기군마다의 매력을 최대한으로 표현할 수 있는 레퍼토리(말러, 버르토크, 브람스 등) 를 준비하고 있죠. 함께 연주하는 다니엘 로자코비치는 저와 오래 우정을 나눠온 음악적 동반자이자 절친이에요.”
암스테르담=이주현 기자
※메켈레의 인터뷰 전문과 RCO 심층 분석은 ‘아르떼’ 매거진 1주년 특별호(6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