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23일 공개한 ‘자경단 사건’은 텔레그램이 국내 수사기관에 관련 자료를 넘겨 수사가 이뤄진 첫 사례다. 2023년 12월 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텔레그램 측을 지속적으로 설득한 끝에 지난해 9월 사건과 관련된 데이터를 제공받았고 10월부터 공식적인 수사 협조 체제를 구축했다. 그동안 텔레그램은 각국 정부의 범죄 수사 협조 요청에 대해 사생활 보호를 들어 외면해 왔지만, 파벨 두로프 텔레그램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가 지난해 8월 프랑스에서 체포된 이후 방침을 바꿨다. 정부는 앞으로 마약 유통망 적발을 위해서도 텔레그램 측과 공조하기로 했다.
▷한국에서 텔레그램이 인기를 끌기 시작한 건 2014년부터다. 당시 카카오톡 압수수색 논란 등으로 사이버 검열 우려가 커지자 많은 사람들이 텔레그램으로 ‘메신저 망명’에 나섰다. 해외에서 서버를 운영하고 있고 보안성이 우수하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시작은 자유를 위한 탈출이었는지 모르지만, 시간이 갈수록 텔레그램은 마약 성범죄 테러 사기 등 각종 범죄가 모의, 거래되는 어둠의 통로가 됐다. 텔레그램을 악용한 2020년 ‘n번방’ 사건은 사회적 공분을 자아냈다.
▷대화가 밖으로 알려지는 것을 꺼리는 정치인들도 텔레그램을 즐겨 이용한다. 국회에서 의원들이 텔레그램 앱을 사용하는 모습이 종종 카메라에 잡힌다. 2022년 윤석열 대통령과 권성동 당시 국민의힘 원내대표의 텔레그램 대화에서 포착된 ‘체리따봉’ 이모티콘이 유명하다. 지난해 12월 비상계엄 직후에는 용산 대통령실 참모들의 ‘텔레그램 갈아엎기’가 러시를 이뤘다. 텔레그램을 탈퇴했다가 재가입하는 것이다. 윤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도 텔레그램 계정을 지웠다.▷텔레그램 대화 내용을 지우고, 계정을 탈퇴한다고 해도 흔적이 고스란히 남는다. 당초 텔레그램 측은 수사 협조 요청을 거부하며 ‘대화가 남아 있지 않고 철저히 암호화돼 우리도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이유를 댔지만, 정보 제공이 일부 가능하다고 입장을 바꿨다. 텔레그램의 보안정책이 언제 또 바뀔지는 아무도 모른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영원한 은신처란 결코 있을 수 없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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