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국방부 정책차관으로 지명된 엘브리지 콜비가 한국의 외교 소식통에게 했다는 말이다. 미국 본토가 공격받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한국에 확장억제를 제공할 필요가 없다는 취지다. 그러면서 콜비는 북한이 이미 핵 보유 국가가 됐다는 인식을 드러냈다고 한다. 다른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 등 특별임무 담당 특사로 지명된 리처드 그리넬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서울을 구하기 위해 LA가 핵폭탄을 맞아도 된다고 할 미국인은 없고 자신도 찬성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넬은 지난여름부터 “북핵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face reality)고 말해 왔다고 이 소식통은 전했다.
대남 핵위협 해결 없는 북-미 대화 안 돼
그리넬과 콜비 모두 트럼프 외교안보 라인의 최측근으로 꼽힌다. 취임 첫날 나온 트럼프 대통령의 “김정은은 이제 핵 국가(nuclear power)” 발언이 그냥 나온 게 아니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트럼프 행정부에서 나온 모든 시그널은 트럼프가 북핵 용인을 전제로 대북정책의 틀을 수립할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다.그 핵심은 북한 핵무기가 미국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북-미 관계 개선을 제안하고 미국을 겨냥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폐기를 요구하는 것이 트럼프의 우선 목표가 될 공산이 크다는 게 많은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문제는 김정은이 대남 공격용 전술핵무기 개발을 가속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은 한국 전역을 겨냥한 신형 미사일 대부분에 탑재가 가능한 전술핵탄두 ‘화산-31’을 개발했다. 지난해 처음 공개한 우라늄 농축시설은 대남 전술핵무기 제작용이라고 김정은 스스로 밝혔다.
트럼프가 북한의 핵 보유를 사실상 인정하고 자국 보호를 위한 ICBM 폐기로 협상 전략을 구체화하는 순간 한국을 타깃으로 한 김정은의 핵 공격 위협은 거래 대상에서 빠진다. 한국이 용납할 수 없는 문제다.
한미 안보이익 충돌 ‘트럼프 모멘트’ 직면
머지않아 북핵을 둘러싼 한미 간 국익이 충돌하는 ‘트럼프 모멘트’에 직면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러면 한국에서 핵무장 여론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
물론 콜비를 비롯한 트럼프 행정부 인사들은 ‘우호적 핵 확산’ 개념을 거론한다고 한다. 중국이 미국에 버금가는 핵 강국 야심을 숨기지 않고, 러시아는 핵 선제공격 위협을 노골화하고 있다. 그러니 한국 핵무장을 포함한 모든 옵션을 검토할 수 있다는 논리다. 하지만 중-러 견제라는 미국 이익을 고려한 핵무장을 한국이 선택하는 게 맞을까. 간단치 않은 문제다.
무엇보다 우리는 북한의 핵위협에 가장 직접적으로 노출된 북핵 문제의 제1 당사자다.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 30여 년 비핵화 목표를 포기하고 북핵을 용인한다고 공식 선언할 경우 국론 분열을 감당하기 어렵다. 최악은 한국의 권력 공백기에 트럼프가 김정은과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면 트럼프가 북한 비핵화 길에서 탈선하지 않도록 설득할 기회도 사라진다. 그런데 대통령 직무정지 중이라지만 국가안보실과 외교부는 따로 놀고 트럼프 행정부를 전방위로 설득하는 모습이 안 보인다. 극한 대립을 하는 여야도 이 문제에서 협력할 기미가 안 보인다. 이 와중에 트럼프 2기 첫 쿼드 외교장관회의 성명에 ‘한반도 비핵화’가 빠졌다. 트럼프의 새 대북정책 구체화까지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을 수도 있다.
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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