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재단의 창립자인 호암 이병철 선생과 간송 전형필 선생은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한 '문화보국'을 실천하신 분들이었다. 공통된 비전에 의해 설립된 두 기관이 겸재 정선이라는 주제 안에 협력했다는 것은 이 전시를 더욱 뜻깊게 한다."
지난달 31일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에서 열린 '겸재 정선' 특별전 개막식. '금강전도', '인왕제색도' 등 국보급 유물들 못지않게 눈길을 끈 건 전시 도록 서두에 실린 한 인사말이었다. 글쓴이는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 지난 8년간 일선에서 물러났던 그의 공식 복귀를 알리는 순간이었다.
2017년 리움미술관 관장직에서 전격 사퇴했던 홍라희(80)씨가 명예관장으로 돌아왔다. 삼성문화재단은 창립 60주년을 맞아 기획한 호암미술관 특별전 '겸재 정선' 개막에 맞춰 이 같은 사실을 밝혔다. 이날 개막식과 이후 진행된 소규모 만찬을 찾은 홍 명예관장은 "성원에 감사드리고, 더 열심히 하겠다"는 공식 인사를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홍 명예관장은 '한국 미술계 영향력 1위'에 수년간 오를 정도로 막강한 입지와 인맥을 갖고 있다. 세계적인 미술전문매체 '아트넷'이 선정한 세계 200대 컬렉터 목록에 해마다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 회장의 유족들이 국가에 기증한 '이건희 컬렉션'에도 홍 관장의 안목과 조언이 반영됐다.
경기여고와 서울대학교 응용미술학과를 졸업한 홍 관장은 1995년 시아버지인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이 설립한 호암미술관 관장직에 취임하면서 미술계에 정식 데뷔했다. 지난 2004년 서울 한남동에 개관한 리움미술관 관장직을 맡으며 국내 최고의 사립미술관 관장이자 세계적인 컬렉터로 부상했다.
홍 명예관장은 지난 2017년 이른바 '국정 농단' 사태 당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 여파로 리움 관장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8년간 관장직이 공석이었던 리움미술관의 운영은 딸 이서현 운영위원장이 맡아왔다. 코로나19로 1년 7개월간 휴관했던 리움미술관은 2021년 재개관한 뒤 마우리치오 카텔란 개인전, 피에르 위그 개인전 등을 기획했다.
공식 석상에서 잠시 떠난 시기에도 '조용한 행보'를 꾸준히 이어갔다. 홍 명예관장은 지난달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리빙디자인페어에 참석해 현장을 둘러봤다. 지난해 11월 29일 서울 용산동 국립중앙박물관 특별기획전 '비엔나 1900:꿈꾸는 예술가들' VIP 프리뷰 행사에 1시간 넘게 머물며 작품을 감상하기도 했다.
국내 미술계는 홍 명예관장의 복귀가 침체한 국내 미술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을지 주목하고 있다. 삼성가 소식에 정통한 한 미술계 관계자는 "명예관장이라는 직함으로 추대됐지만, 사실상 전면 등장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이병철 창업회장 대부터 이어져 온 삼성가의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이 영역을 가리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며 "이번 겸재 정선 특별전은 가라앉은 고미술품 업계에도 희소식"이라고 했다.
안시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