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한 영화다. 차우(양조위 분)와 첸(장만옥 분)은 격렬한 사랑도, 확실한 고백도 표현하지 않는데 이상하게 애틋하다. 두 사람의 감정은 언어가 아니라 화면으로,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공간으로 우리에게 전해진다. 좁은 복도로 맞닿은 셋집, 어둡고 쓸쓸한 골목길, 반쯤 열린 문틈과 창틀 너머의 장면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말보다 공간이 더 많은 걸 말해주는 <화양연화>는 두 사람의 감정을 공간에 꾹꾹 눌러 담은 영화다.
집 – 미묘한 감정을 만들어내는 밀도 높은 공간
'차우’는 그의 아내와, '첸’은 그의 남편과 살 집을 구한다. 두 사람은 우연히도 같은 날, 같은 건물의 바로 옆집으로 이사 오게 된다. 동시에 이사를 하다 보니 서로의 이삿짐이 섞이기도 한다. 그들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일까?
두 사람의 직장은 권태롭다. 감정적 교류 없이 하루종일 무표정으로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하지만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오면서 긴장감은 높아진다. 두 남녀가 마주치는 집 앞 계단과 복도는 어둡고 좁으며, 숨이 막힐 정도로 밀도 높은 공간이다. 일상의 공간을 압축함으로써 인물의 감정이 억압되고 제한돼 있음을 보여준다. 특별한 감정 표현 없이도 공간을 통해 미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차우의 아내와 첸의 남편이 서로 외도 중임을 암시하는 단서가 영화 내내 등장한다. 그 중 공간으로서 도드라지는 순간은 차우와 그의 아내가 서로 다른 프레임 안에서 전화를 거는 장면이다. 차우는 사각형 프레임에, 그의 아내는 타원형 프레임에 놓여있으며 두 사람이 하나의 프레임에 나오는 경우는 결코 없다.
어느 날 첸이 신문을 가지러 차우의 문턱을 슬쩍 넘는 순간은 관계의 첫 틈을 만든다. 겉보기에는 사소한 일상이지만, 마음의 경계를 넘는 미묘한 감정이 깃들어 있다.
골목길 – 쌓이는 감정, 금지된 관계
첸이 국수를 사러 좁은 골목을 오가는 장면이 반복된다. 국수를 들고 올라오는 길, 우연히 마주치는 차우와의 시선 교환. 가파른 계단이 주는 긴장감이 감정의 씨앗이 된다. 말보다 눈빛, 행동보다 공간적 밀착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두 사람이 골목길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도 참 재밌는 구성이다. 화면은 철창 같은 구조물을 프레임으로 삼는다. 때문에 그들은 새장 속의 새처럼 어딘가에 갇힌 것처럼 보인다. 골목길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이지만, 여전히 창살 같은 사회적 금기가 이들을 억압하고 있다.
에드워드 호퍼 – 프레임에 갇힌 사람들
<화양연화>는 거의 대부분 문틀, 담장 너머에서 인물을 관찰한다. 이를 ‘프레임 속 프레임’ 기법이라 하는데,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를 떠오르게 만든다. 호퍼는 창문 너머로 바라보는 고요한 방, 어딘가 불편한 침묵, 정적인 구도에 숨어 있는 인간의 고독함을 그린다. <화양연화>와 호퍼의 작품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벽과 커튼은 그들을 가두고, 그들의 감정을 절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등장인물을 공간 속에 고립시키고, 외부 세계와 분리된 듯한 느낌을 준다.
다시 집 – 하나의 물리적 공간, 두 개의 심리적 공간
글쓰기를 매개로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진다. 두 사람은 어느새 같은 방 같은 프레임 속에 있다. 첸이 차우의 방에서 밤을 보내고, 침대와 거울, 의자와 램프 사이로 미묘한 감정이 공간에 가라앉는다.
하지만 이 감정은 현실의 벽에 계속 부딪힌다. 집주인의 때 이른 귀가로 인해 첸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불안해한다. 의자에 누워 잠든 차우와 달리, 거울 속에서 고뇌하는 첸의 모습은 감정과 현실 사이에서 길을 잃은 모습을 보여준다. 둘은 좁은 방안에 함께하는 듯 보이지만, 한 사람은 현실에 한 사람은 거울 속 공간에 놓여있다.
호텔 – 감정의 폭발, 도피의 공간
차우는 글을 쓴다는 핑계로 호텔 방을 얻는다. 외부의 시선이 닿지 않는 은밀한 공간이다. 동시에 두 사람의 감정이 더욱 깊어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붉은 커튼이 드리운 복도, 계속해서 반사되는 거울 속의 두 사람. 호텔이라는 도피처에서 두 사람의 감정이 진하게 드러난다.
영화는 붉은색과 초록색의 색채를 통해 긴장감을 시각화한다. 붉은 색은 억눌린 욕망을, 초록색은 심리적 억제를 상징한다. 붉은색과 초록색으로 칠해진 택시, 벽지, 조명, 커튼, 의상을 통해 두 인물이 이중적 감정을 오가고 있음을 드러낸다.
처마 밑 – 그들을 보호해주지 못하는 작은 지붕
첸은 집주인으로부터 행실에 대한 경고를 받고 마음이 복잡하다. 차우가 첸의 회사로 전화를 걸어도 첸은 회신하지 않는다. 퇴근 후 첸은 비를 피해 처마 밑에 서있다. 차우는 그런 그녀를 위해 우산을 건넨다. 하지만 관계를 들킬 수 없는 두 사람은 함께 집으로 향할 수도, 차우의 우산을 쓰고 첸 혼자 돌아갈 수도 없다. 간신히 비를 막아주는 작은 처마 밑에서 이들을 갈 곳을 잃는다.
결국 차우는 첸과의 관계를 정리하려 마음먹는다. 첸이 남편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관계를 단번에 끊어내지 못하고 이별 연습을 한다. 연습 삼아 이별의 말을 건네지만 첸은 진심으로 눈물을 흘린다. 차우는 창살 앞에서 그녀를 껴안는다.
앙코르와트 – 금지된 감정의 무덤
시간이 흘러 차우는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를 찾는다. 그는 오래된 사원의 벽 틈에 한참을 속삭이고, 조심스레 흙으로 막았다. 900년을 버텨온 거대한 사원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차우의 감정을 묵묵히 받아들인다. 짧은 인간의 삶과 사사로운 감정으로는 흔들리지 않을 만큼 견고한 공간이다. 아무도 없는 앙코르와트를 비추며 그들의 ‘화양연화-꽃처럼 아름다운 시절’은 끝난다.
최영균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