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날 좀 도와줘야겠어."
지난 7일, 자정을 넘기기 두 시간 전. 박정희 국립극단 단장은 휴대전화 너머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연극 '헤다 가블러' 개막을 하루 앞두고 브라크 역을 맡은 윤상화 배우가 건강 문제로 무대에 오르기 어려워지자 극단 시즌단원인 홍선우 배우에게 SOS를 친 것.
브라크 검사(헨리크 입센 원작에선 판사)는 헤다를 끊임없이 유혹하고 조종하려는 인물이다. 1막부터 4막까지 빠짐없이 등장하며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역할이다. 전체 대본 80여쪽 중 30쪽이 브라크 대사다. 박 단장의 전화를 받고 긴급 투입된 홍선우는 미뤄진 개막일(지난 16일)까지 8일간 대사 암기부터 동선 연습, 리허설까지 벼락치기에 돌입했다. 그는 막중한 부담을 안고 시작했지만, 일부 관객의 경우 배우 교체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안정적인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지난 26일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난 홍선우는 이 같은 관객 평가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지금까지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이번 작품을 통해 더 열심히 할 수 있다는 걸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로 13년 차 배우인 홍선우에게 이번과 같은 교체 투입은 처음이다. '헤다 가블러'가 올 상반기 기대작이라는 점도 그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는 박 단장의 전화를 받고 잠시 고민의 시간을 가진 뒤 곧장 대본을 받아들었다. 다음 날 떠나려던 제주도 여행을 포함해 개인 일정은 모두 취소했다.
"그날 새벽 6시까지 대본을 보다가 잠을 청했는데, 잠이 하나도 오질 않더라고요. 인지도가 높지 않은 제가 작품에 늦게 합류하는 상황이다 보니 걱정이 정말 많았어요. 그래서 더더욱 대사를 빨리 외워야겠다고 생각했죠. 일단 '성실함' 하나는 인정받아야 하니까요."
평소대로 그는, 다른 배역의 대사를 자신의 목소리로 녹음해 재생시킨 뒤 본인 대사를 육성으로 발화하는 식으로 반복 연습했다. 공책에 대사를 빽빽이 적는 일명 '깜지'도 활용했다. "첫 일주일은 잠을 거의 못 잤어요. 자고 일어나면 외운 게 날아갈 것 같았거든요." 홍선우는 그렇게, 자신의 약속대로 이틀 만에 대사를 모두 외웠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는 두 달여 연습 기간 중 대사 암기에 2주가량 할애한다.
존경하는 선배를 대신하는 역할이다 보니 압박은 더 컸다. 그는 윤상화와 2020년 연극 '작가'(박정희 연출)에 함께 출연한 인연이 있다. "윤 선배님은 연극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분이세요. 저도 선배님처럼 연극을 대하고,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해왔죠. 그래서 이번 역할에 더 큰 책임을 느꼈어요. 혹시라도 제가 잘못해서 공연이 어그러지면, 선배님이 관객들과 다른 배우들에게 얼마나 미안해하실까 싶어 더 열심히 준비했어요. 사고라도 날까 봐 운전도 피하고, 요즘은 지하철로만 다니고 있어요."
헤다 역의 이혜영을 비롯한 대배우들도 홍선우에게 힘을 실어줬다. "이혜영 선배님은 카리스마 넘치는 역할을 많이 맡으신 이미지 때문인지 사실 처음에는 두렵기도 했어요. 그런데 같이 연기를 하다 보니, 선배님은 상대 배우를 안아주는 것처럼 편안하게 해주시는 분이라는 걸 알게 됐죠. 제가 혼자 연습하기로 한 날, 이혜영 선배님이 휴일인데도 불구하고 일부러 나오셔서 저와 대사를 맞춰주셨어요. 피로가 누적되셨을 텐데, 정말 감사한 일이죠. 기존에 윤상화 선배님이 연기하던 스타일과 상관없이 제가 하고 싶은 연기를 마음껏 펼치라고 응원해주신 것도 감동이었어요."
홍선우는 브라크를 "헤다를 육체적으로 지배하려는 인물"로 해석하고 있다. 그는 "윤상화 선배님은 브라크가 헤다를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것에 초점을 두셨는데 제가 그걸 연기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며 "저만의 방식으로 풀어가기 위해, 브라크가 헤다를 유혹한다는 느낌으로 접근했다"고 설명했다.
마성의 여인 헤다를 둘러싼 남자 중 어떤 인물을 연기해보고 싶은지 물었다. 그는 "(이제) 헤다 가블러는 안 하고 싶다"고 장난스레 받아친 뒤, 예술적 성공을 거둔 헤다의 옛 연인 뢰브보르그를 꼽았다. "제가 겪어보지 못한 천재의 삶을 연기해보고 싶어요. 윤 선배님이 브라크를 연기하고, 제가 뢰브보르그를 맡는다면 재밌을 것 같아요."
홍선우에게 '헤다 가블러'는 자신을 배우로서 긍정하게 된 '터닝 포인트'가 됐다. 그는 "몇 년 전부터 '내 한계는 여기까지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한계를 그었다"면서 "하지만 이번 경험을 통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웃어 보였다.
"한 작품으로 인생이 확 바뀌진 않아요. 그렇지만 이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 더 열심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앞으로 홍선우라는 사람이 기억에 남기보다는, 홍선우가 맡았던 배역이 관객들의 기억에 오래 남았으면 좋겠어요. 관객들이 제 연기로 희로애락을 느끼고 위로까지 받을 수 있다면, 그건 인생에서 한 번쯤 꼭 해볼 만한 일 아닐까 싶어요."
허세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