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연극 <헤다 가블러>를 보고 있으면 이 작품은 연극보다는 영화에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게 된다. 연극은 무대와 객석이라는 대칭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평면적이지만 시공간의 이동이 자유로운 영화는 그 반대로 ‘어쩔 수 없이’ 입체적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작품 속에서 주인공 헤다 가블러와 그녀의 예전 연인 뢰브보르그가 염정(艶情)을 불태우는 모습은 영화라면 몇 년 전으로 둘을 되돌려 죽자살자의 베드 신으로 촬영됐을 것이다. 뢰브보르그가 총기 오발 사고로 죽기 전의 모습 같은 것은 뭇 여자와의 그룹 섹스 향연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헤더 가블러>를 지금의 영화로 만든다면, 만약에 박찬욱 같은 감독이 새로 만든다면, 그의 영화 <아가씨>마냥, 꽤나 수위가 높았을 가능성이 높다.
<헤다 가블러>는 세계 영화권, 특히 유럽에서 무수하게(80편 넘게) 영화로 만들어졌지만 헨리크 입센의 희곡에 충실하게, 연극을 그대로 옮기는 방식으로만 만들어져 왔던 게 사실이다.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1962년 판 TV용 영화가 그랬다. 스크린 안 공간도 무대 공간 그대로 헤더의 거실만을 사용했다. 그래서 이 연극은 강렬한 현대영화로 다시 재해석돼야 한다는 생각을 이혜영의 연극을 보며 자꾸 하게 된다. 무엇보다 이혜영 아닌가.
헤더 가블러는 이름이다. 노르웨이의 전설적 장군 가블러의 딸이다. 헤다(이혜영)의 현재적 문제는 욕망과 현실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그녀는 유복하게 컸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다. 헤다처럼 욕망을 따라가며 사는 사람들의 문제는 중간중간 약간씩 정신을 차린다는 것이고 그럴 때면 자기 딴에는 이성적인 행동을 한답시고 새로운 선택을 한다는 것인데 이게 또 나중에 자신의 욕망에는 커다란 굴레가 되기 십상이다. 작품에서는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헤더 가블러는 젊어서 꽤나 방탕하게 살았고 그때 만난 남자가 뢰브보르그(김은우)다. 헤다는 이제는 조금 정리된 인생을 살겠다고 생각한다. 대학교수 임용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조지 테스만(김명기)을 만나 충동적으로 결혼을 한 이유이다. 조지는 답답한 소시민형 인간이다. 소심한 학자 스타일이다. 연극은 이 둘이 막 6개월의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오슬로 집에 들어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연극 <헤다 가블러>는 익숙지 않은 북유럽 발음의 이름들 때문에 작품에 대한 사전지식이나 정보가 없는 한 다소 진입장벽이 높게 느껴진다 (대체 뢰브보르그라는 거야, 로프뵈르그라는 거야?). 그리고 인물 간 관계가 애매모호하거나 꽤나 위선적으로 느껴져서 더욱 그렇다. 작품 초반은 인물들에게 몰입이 잘 안된다. 그런데 그것은 원작자 헨리크 입센이 완벽하게 19세기 인물이라는 것(1828~1906)을 생각하면 조금씩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이때의 귀족사회 혹은 상류사회는 꽤나 문란했을 것이다. 일종의 폴리아모리가 성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헤다는 남편인 조지와 검사 브라크가 있고 옛 남자 뢰브보르그와 동시에 관계를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현대 영화에는 이런 얘기가 많다. 그걸 19세기 식으로 표현을 감추고 있을 뿐이군, 하고 이해하면 연극이 쉬워진다.
헤다의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이 있다. 태아 엘브스테(송인성)이다. 태아는 헤다가 어릴 때 ‘일진 놀이’를 하던 상대이다. 태아는 하녀 출신이다. 태아는 헤다를 무서워하고 때론 증오하지만 그녀에게 어쩔 수 없이 가스라이팅 돼 있다. 태아 역시 세 남자와 관계를 갖는데 헤다의 남자 뢰브보르그와 헤다의 현재 남편 조지, 그리고 오로지 돈 때문에 결혼한 자신의 현재 남편이자 노인인 엘브스테라는 남자다. 입센의 연극은 19세기식 섹스의 관점과 관계로 얽혀 있지만 당시의 부르주아 윤리학에 따라 오로지 말과 말, 말말말로만 그것을 유추하게 만든다. 때문에 ‘섹스의 상상력’을 가미시키는 머릿속 공정 과정이야말로 이 연극 <헤다 가블러>의 매력이다. 연극 평론계에서는 다소 어이없다고 혀를 찰 수도 있겠지만 인물 간 섹스의 관계를 의심하고 그 역(力) 관계를 풀어서 보다 보면 극에 대한 이해가 찰지게 되어진다.
게다가 헤다 가블러 캐릭터는 1940년대 영화 식으로 말하면 팜므 파탈이다. 한자어로 요부(妖婦)라는 상형어구가 딱 들어맞는다. 굉장히 싫으면서도 굉장히 매력적인 여자다. 이런 여자들은 대체로 남자를 죽음으로 몬다. 남자들은 자기가 죽어 가면서, 혹은 스스로 죽으면서도 그것이 종국적으로는 여자 탓이라는 걸 깨닫지 못한다. 레이먼드 챈들러가 각본을 썼고 빌리 와일더가 연출한, 바버라 스탠윅 주연의 1944년 영화 <이중배상>이나 1981년 미국 로렌스 캐스단이 만든 <바디 히트> 등 많은 할리우드 영화의 수많은 팜므 파탈 캐릭터가 이 연극 <헤다 가블러>에서 나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는 절로 무릎을 치게 된다.
헤다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친구이자 ‘착취’의 대상인 태아를 괴롭힌다. 현재는 자신이 버린 남자임에도 뢰브보르그가 태아에 의존하는 것을 싫어한다. 태아가 정략 결혼한 늙은 남자 품을 외면하고 젊은 지식인 남성에게 안기는 것을, 눈 뜨고 보지 못한다. 헤다는 뢰브보르그와 태아 사이를 갈라놓으려 하면서도 정작 남자가 자신 곁으로 돌아오거나 옆에 있으려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헤다가 원하는 것은 ‘관계의 이상한 파멸’이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온전히 주체적이 되기 위해서는 위선적이고 자기방어적이며 그래서 꽤나 규칙적으로 닫혀져 있는 (19세기 부르주아적) 삶의 방식이 무너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조지 테스만과의 삶에 싫증이 난 상태다. 그녀는 조지를 지긋지긋해한다. 그러면서도 검사 브라크의 구애에는 냉랭하다. 그녀는 뢰브보르그의 총기사고 이후 결국 브라크가 자신의 덜미를 잡으려 하는 것에 대해서도 진저리를 친다.
결국 <헤다 가블러>란 연극은 모든 대사와 상황, 캐릭터를 19세기 후반 빅토리아 시대, 곧 귀족에서 부르주아로 세상의 권력이 넘어오던 시대, 그러면서도 여전히 개인의 주체 특히 여성성의 자아를 인정하지 않았던 시대를 ‘내재적(內在的)인 시점’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현대적 어법과 어휘로 재해석해내면 이해가 되는 작품이다. 거꾸로 되짚어 보면 한 여성이 가정과 사회로부터 분리된 자아로서, 그럼으로써 올곧은 개체로 독립하게 된 것이 그리 오래된 얘기가 아니며 헤다 가블러처럼 수없이 감정의 소모를 겪고 자기 파괴적 고통을 겪고 나서야 이루어진 일임을 깨닫게 된다. 『헤다 가블러』는 입센이 1979년에 쓴 자신의 작품 『인형의 집』의 확대 버전이자 자기 복제를 다소 파괴적으로 이루어 낸 작품이다. 『헤다 가블러』는 1890년 작품이다. 이에 비하면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쓴 1856년작 『마담 보바리』는 귀여운 순애보였던 셈이다.
헨리크 입센의 이 오래된 고전, 100년이 넘은 작품이 여전히 각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도 이혜영과 이영애라는 두 스크린 스타 캐스팅으로 동시에 두 개의 무대(명동예술극장, LG아트센터)에서 상연되는 건 무슨 이유에서일까. 혼란한 시대, 무언가의 힘이 교체되는 시기, 기존의 가치관과 윤리관만으로서는 세상을 해석할 수 없는 시대에 그것을 뚫고 가는 것은 여성성, 여성주의의 재해석에 있다는 점을 보여 준다. 여성성을 시대에 맞게 받아들이고 해석할 수 있어야 세상을 교정해 갈 수 있다. <헤다 가블러>가 부여하는 의미이다. 이혜영의 연극은 6월 1일까지, 이영애의 연극은 6월 8일까지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