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 시간이 만든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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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시간이 만든 미학

‘고즈넉한 산사, 화려한 조선 궁궐, 종로 북촌로를 따라 서 있는 살림집들….’

한옥은 어디에 놓여 있든 우리가 살아본 적 없는 그 시절로 데려가곤 한다. 반들반들해진 대청마루에 앉아 마당을 바라볼 때 처마 끝 추녀에 달린 풍경에서 맑은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안에서 우리는 그곳에 살았던 사람의 삶과 연결된다. 한옥의 멋은 바로 그 시간에 있는 셈이다.

한옥은 시간을 머금고 자란다. 지붕을 받치는 기둥, 그 밑의 돌 하나와 기와 한 장까지 모두 조상의 시간이 담겨 있다. 조상들은 한옥을 짓는 어느 단계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 한옥의 시작은 어디일까. 바로 바닥이다. 큰 장비 없이도 단단한 지반을 만들었다. 그 핵심은 흙과 돌을 아주 얇게 여러 겹 다져내는 것에 있다.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돌을 깔고 다진 후 다시 흙을 채워 넣고 다지는 식이다. 이런 과정을 켜켜이 반복한다. 참으로 지루하고 인내심을 요구하는 작업이지만 조상들은 기초를 그만큼 중시했다.

돌도 그저 잘라내지 않았다. 정으로 구멍을 파고 거기에 잘 말린 밤나무 가지를 넣었다. 물을 부으면 가지가 불어나면서 돌이 자연스럽게 깨졌다. 돌을 깬 후에는 혹두기(거친 돌 표면 다듬기), 정다듬(정으로 돌을 쪼아 다듬기), 도드락다듬(네모난 망치로 두들겨 다듬기), 잔다듬(날망치로 잘게 찍어 곱게 다듬기), 물갈이까지 거쳤다. 하나의 돌을 마련하는 데도 수많은 장인의 손길이 오갔다.

한옥은 자연과 조화를 중시하며 시간 속에서 깊어지는 멋을 품었다. 한옥 재료로 인기 있는 화강석은 경기 포천에서 나는 포천석이다. 황등석, 상주석보다 단단하지 않은 포천석을 주로 사용한 것은 조화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석재는 목재보다 더디게 나이가 든다. 이렇게 되면 시간이 흘러 집에서 석재만 도드라져 보일 수 있다. 포천석은 나무와 비슷한 속도로 나이를 먹는다. 함께 시간을 담아가는 것. 한옥에 중요한 것은 그것이었다.

한옥에 주로 사용하는 소나무는 느티나무나 참나무에 비해 재질이 연하다. 수분 비율을 낮추고 단단함을 갖게 하기 위해선 조급해선 안 됐다. 그늘에서 아주 천천히 시간을 두고 말려야 한다. 나무를 쓸 때는 본래 나무가 서 있던 위아래를 맞췄다. 옹이 자국에서 가지가 자라난 방향을 보고 어느 쪽이 하늘을 향했는지 확인했다. 지붕은 인위적 곡선이 아니라 줄 양쪽이 고정돼 그 자체 ㅈ 무게만으로 드리워져 있을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곡선인 현수선을 활용했다.

한국의 시간과 자연을 담아내 진정한 예술이 된 한옥. 그저 오래된 것이 아니라 ‘오래 남아 있는 것’의 가치를 이야기해 보려 한다.

구들은 보일러, 흙 대신 방열재…전통을 재해석한 '도시한옥'
진화하는 한옥 건축

①‘상촌재’ 대청마루

①‘상촌재’ 대청마루

‘현재가 과거를 바꿀 수 있을까. 바뀐 과거는 전통으로 인정될 수 있을까.’ 한옥은 두 가지 질문에 모두 ‘그렇다’고 답하고 있다.

가장 오래된 도시 건축인 한옥은 현대적 주택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다양성과 창의성을 수용하지 못하는 한옥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어쩌면 당연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변화다. 보일러가 발달한 현대에 구들을 까는 것은 비효율적일 수 있다. 방열재 대신 고하중·저단열의 흙을 고집할 이유도 없다. 가장 전통적인 가옥에서 미래건축으로 진화하고 있는 한옥은 시대·공간·세대를 초월해 영속할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② ‘상촌재’ 외부 전경

② ‘상촌재’ 외부 전경

한옥은 전통한옥, 도시한옥, 신한옥 등으로 진화하고 있다. 전통한옥은 전통적인 건축 원리와 공간 질서에 충실하게 맞춰 지어진 한옥을 뜻한다. 도시한옥은 근현대 도시형 주택으로 지은 한옥. 현대화된 공간과 설비를 수용한 게 특징이다. 신한옥은 현대적 기술로 재구성된 재료를 사용하는 오늘날의 한옥건축을 말한다.

최근에는 여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고 있다. 목구조가 근간이 된 복합구조 건물이면서 전통을 재해석한 미래의 디자인 건축물도 한옥 건축양식이라는 이름으로 지원하고 있다. 한옥의 일부를 차용하거나 재해석한 현대건축물도 한옥 디자인 건축물로 인정해 준다. 실제 생활에 편리하고, 매력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한옥의 개념을 확장해가는 셈이다.

한옥의 처마와 목구조의 아름다움을 현대건축으로 재해석한 주한스위스대사관이 대표적이다. 서울 종로구 송월동 경희궁자이 인근에 있는 이 건축물은 한국의 한옥에 스위스 전통 가옥인 ‘샬레’의 특징을 조화롭게 적용해 ‘스위스 한옥’으로 불린다. 외부는 회색빛 콘크리트지만 내부는 화강암으로 장식된 마당과 목구조가 눈에 들어온다. ㄷ자 구조, 나무로 만든 창살 등 한옥에서 차용한 아름다움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③‘불이헌’ 양옥주택서 본 풍경

③‘불이헌’ 양옥주택서 본 풍경

서울 중구 신당동의 단층 한옥 불이헌은 화강석과 유리를 활용해 현대적인 외양을 갖추고 있다. 단정하지만 초라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과하지 않은 한옥 특유의 매력을 머금기 위해 옛 한옥의 디테일은 챙겼다. 불이헌의 난간은 전통 방식 그대로 짜맞춤으로 만들어졌다. 창도 실내는 띠살창으로 하고, 누마루는 완자살창으로 해 각 방의 위계를 표현했다. 단열재와 스프링클러는 보이지 않게 신경 썼다.

전통 기술을 전수하거나 기존 한옥을 잘 살리는 경우 인센티브를 주고 있다. 종로구 옥인동의 상촌재는 과거 ‘웃대’로 불리던 인왕산과 경복궁 사이에 있다. 조선 초기 왕족 및 사대부가 거주하던 곳이다. 인왕산 기슭으로 경사가 있고, 자연스러운 단차가 있다. 상촌재는 이를 아주 영리하게 활용했다. 경사를 따라 안마당, 사랑마당, 행랑마당을 배치해 각각의 공간을 명확하게 분절하면서도 시각적으로 연결되도록 했다. 사랑채에는 전통적인 온돌 방식을 재현해 누구나 이를 체험해볼 수 있게 했다.

툇마루서 펼쳐진 인왕산…한옥살이선 자연이 오감으로 느껴지죠
아파트 떠나 한옥으로 간 김지운 씨

 김범준 기자

김범준 기자

“남편은 매일 저녁 (퇴근 후) 휴가를 가는 기분이라고 하더라고요.”

서울 북촌의 신축 한옥 ‘소오헌(嘯傲軒)’에서 2년째 거주하고 있는 김지운 씨(41·사진)는 ‘한옥살이’의 매력을 이렇게 설명했다. 서쪽으론 탁 트인 창 너머로 겸재 정선이 감명받아 그렸던 인왕산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동쪽을 바라보면 북촌한옥마을의 아름다운 기와 물결이 넘실거린다. 전통 한옥의 핵심 요소인 ‘차경’(借景·경치를 빌리다)을 최대한 살린 덕분에 집이 자연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안식처가 됐다.

김씨 부부는 원래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서울 강남 아파트에 살았다. 김씨는 “전망이 정말 좋긴 했는데, 거리감과 고립감이 느껴졌다”고 했다. 우연히 한옥에 사는 지인의 집을 방문한 뒤 한옥의 포근함에 매료됐다. 한옥은 곧 ‘드림 하우스’가 됐다. 수년간의 건축 작업 끝에 ‘ㄷ’자 형태의 2층(지하 1층~지상 1층) 한옥을 지었다.

여덟 살배기 아들 키우기에도 최적의 장소라는 설명이다. 아파트에 살았다면 “뛰면 안 돼”란 말을 수시로 들었을 테지만 마당과 마루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다. 공동체의 정도 배울 수 있다. 김씨는 “(아들이) 골목을 내려가면서 기념품 가게 아저씨, 보안관, 이웃 등과 자연스레 교류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들은 특히 툇마루를 좋아한다고 했다. 날씨나 계절에 상관없이 언제든 나가 하늘을 볼 수 있는 ‘실외 거실’인 셈이다.

다양성과 유연성도 한옥의 장점이다.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운치가 있다. 눈 속에 핀 매화를 볼 수 있는 겨울도, 마루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더위를 식힐 수 있는 여름도 각자의 매력이 있다. 한옥의 창문(窓門)은 창이 되기도, 문이 되기도 한다.

한옥살이의 불편한 점은 없을까. 유지 관리에 손이 많이 가는 건 사실이다. 목재나 한지 같은 소재가 계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만큼 칠, 방수, 보온 등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줘야 한다. 하지만 김씨는 “아파트에 비해 번거롭지만 집과 교감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며 “아껴주는 만큼 집도 가족에게 더 따뜻한 품을 내어주는 기분”이라고 했다.

한옥 1채, 나무 250그루 들어…그야말로 '자연속의 삶'이죠
35년간 한옥만 지은 정태도 대목수

정태도 대목수가 목재를 가공하는 ‘치목’ 작업을 하고 있다.

정태도 대목수가 목재를 가공하는 ‘치목’ 작업을 하고 있다.

한옥은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서울 종로구 북촌이나 전주 한옥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와집은 물론 초가집과 너와집도 모두 한옥이다. 최근엔 전통 한옥과 현대건축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한옥’도 많다. 다양한 형태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한옥의 정체성 중 하나는 바로 ‘나무로 만든 집’이라는 점일 테다.

35년째 나무를 다루고 있는 정태도 대목수(54·태도건축 대표)는 “자연 재료로 지었다는 게 한옥의 가장 큰 매력이자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전용면적 84㎡ 한옥에 보통 250그루 나무가 들어간다고 한다. 그야말로 ‘자연 속의 삶’이다. 한옥에는 주로 소나무가 사용된다. 정 대목수는 “소나무 몸통에선 다량의 피톤치드(천연 항균 물질)가 나오고, 습도와 온도 등을 알아서 조절해 준다”며 “나이테 모양이나 나무의 질감, 색감 등을 보고 있노라면 기분이 편안해진다”고 전했다.

소나무는 모양에 따라 쓰임새가 달라진다. 단면의 크기가 같을 때 나이테가 촘촘한 나무가 선호된다. 속성으로 자란 게 아니라 천천히 성장한 나무가 그만큼 내구성이 좋아서다. 국내에서 점점 ‘좋은 목재’를 구하기 어려워지고 있는 건 아쉬운 대목이다. 정 대목수는 “과거엔 느티나무 한옥 등도 많았는데 (수급 문제 등으로) 요즘엔 대부분 소나무를 쓴다”며 “캐나다나 호주 등에서 소나무를 수입하는 사례도 많다”고 말했다.

지붕에 서까래를 거는 작업.

지붕에 서까래를 거는 작업.

정 대목수는 경복궁과 창덕궁 등 문화재 복원 작업을 하면서 처음 한옥의 세계를 접했다. 이때 한옥의 재료 선택과 설계 과정 곳곳에 선조의 지혜가 숨어 있다는 점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는 “선조들은 ‘보고 자라는 이의 성격이 삐뚤어질 수 있다’는 이유로 사람 사는 집은 휘어진 나무로 짓지 말라고 했다”며 “한옥 내부의 층고는 아파트 2층 수준인데, 큰사람을 배출하려면 천장을 높게 지으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단순한 ‘거처 공간’을 넘어 사람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스며들어 있는 점이 한옥의 매력이라는 얘기다.

최근 ‘한옥살이’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한옥을 신축하려 할 때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할까. 먼저 부지를 정해야 한다. 땅의 크기와 모양, 주변 환경에 맞게 평면을 정하고 설계 작업을 한다. 규격과 건축 양식 등이 정해지면 나무를 고른다. 정 대목수는 “산에서 직접 원목을 구입해 3년간 자연건조 과정을 거치면 참 좋긴 하다”면서도 “시간이나 비용 등의 문제로 제재소에서 바로 구입할 때가 많다”고 했다. 한옥을 짓는 데는 목수뿐 아니라 기와공, 석공, 미장 등 12개 분야 장인이 투입된다.

기둥을 수직으로 세우는 작업.

기둥을 수직으로 세우는 작업.

정 대목수는 시대 변화에 맞춰 한옥도 변화하는 게 자연스럽고 또 바람직하다고 했다. 그는 “한옥을 주로 남향으로 짓는 만큼 습도가 높은 집의 북향 쪽 공간이 많이 상하는 문제가 있다”며 “집 뒤편은 한옥이 아닌 현대식 마감 소재를 사용하는 식의 변화를 생각해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통 한옥은 문에 한지를 발랐다. 한지가 충분히 매력적이긴 하나 ‘뷰’(전망)를 최고로 여기는 현대인의 성향을 반영해 ‘유리문’을 다는 유연함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전통 한옥도 생활 환경에 따라 구조와 형태가 다 달랐다. 춥고 눈이 많이 오는 강원도엔 집안의 온기를 간직할 수 있는 ‘ㅁ’ 자 형태 집이 많았다. 전라도 평야의 지붕은 나지막한 산세와 어울리게 구성됐다. 정 대목수는 “문화재라고 하면 당연히 과거의 법칙에 맞춰야 하는 게 맞다”면서도 “한옥은 ‘문화재’가 아니라 대대로 거주해온 ‘집’이다”고 강조했다.

서울 도심속 기와물결에 원더풀…외국인들 줄서는 한옥호텔
한국문화 집약체 '북촌빈관'

① 종로구 ‘북촌빈관’ 외부 전경

① 종로구 ‘북촌빈관’ 외부 전경

한옥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공공에서 직접 운영하는 한옥 서비스도 늘고 있다. 한옥에서 먹고 자고 즐기며 과거의 시간을 담아내는 경험을 즐기려는 관광객의 방문도 증가하고 있다.

서울 종로구 북촌에 있는 북촌빈관이 대표적이다. 빈관은 ‘손님이 머무르는 집’이라는 뜻이다. 북촌빈관은 본래 북촌 개발과 한옥의 근대화를 이뤄 ‘원조 디벨로퍼’로 불리는 정세권 선생의 활동터였다. 이후 종교시설로 쓰이던 건물을 서울시가 2019년 인수해 지금의 모습으로 고쳤다. 안방 2칸과 사랑방 2칸, 건넌방 1칸으로 구성된 한옥 호텔로 손님을 받고 있다. 방문객의 80%가 외국인일 정도로 외국인 관광객의 호응이 높다.

북촌을 한눈에 아우르는 전망 좋은 마당이 이 집의 하이라이트다. 대청마루에 앉아 아침이면 찾아오는 새들을 감상할 수 있다. 북촌빈관은 건물만 한옥이 아니다. 방 안에는 조선시대 백자를 비롯한 골동품과 고가구가 비치돼 있다. 마치 조선시대 한옥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게 꾸며졌다.

한옥 건물 자체뿐 아니라 그 안의 한국 문화를 알리는 것도 중요한 홍보 포인트다. 북촌빈관에서는 막걸리를 활용한 스파, 전통 다도 체험, 가야금 연주 등을 즐길 수 있다. 본관에는 천연황토 찜질방도 있다. 한 팀당 30분씩 프라이빗한 찜질을 즐길 수 있다.

② 현대식으로 꾸며진 내부 모습

② 현대식으로 꾸며진 내부 모습

서울 종로구 계동에 있는 계동배렴가옥은 전통을 재창조하는 예술가의 소통 창구이자 시민의 놀이터로 자리하고 있다. 이 가옥은 동양화가인 배렴이 살았던 주택으로, 국가등록유산으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툇마루에서 프렌치 재즈가 연주되고, 대청마루에서 요가 수업도 열린다. 한옥이 과거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을 넘어 우리의 삶도 담아가는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 종로구 필운동의 홍건익가옥은 시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공 한옥이다. 1930년대 지어진 근대한옥으로, 서울시 민속문화재 제33호로 지정돼 있다. 행랑채에서 별채, 후원까지 아름다운 근대한옥 풍경을 즐길 수 있다.

강영연/이인혁 기자 yy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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