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구, 전차, 민족운동 지회까지… 고양군 아닌 ‘京西’ 위상 차지한 마포[염복규의 경성, 서울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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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요지 마포에 공업시설 들어서… 전차 개통 뒤 인구 두 배 이상 증가
마포 아우른 신간회 경서지회 출범
일찍 도시화되며 도시문제 나타나… 분뇨탱크, 전차요금 주민대회 열려
한양 가는 ‘서쪽 관문’ 역할 이어져

1906년 대한제국이 근대 건축에 필요한 벽돌을 생산하기 위해 마포에 세운 연와 제조소. 사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1906년 대한제국이 근대 건축에 필요한 벽돌을 생산하기 위해 마포에 세운 연와 제조소. 사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 경성 생활권으로 편입된 마포

1927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세력이 연합한 민족통일전선 단체 신간회가 조직됐다.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항일민족운동 단체였다. 신간회 본부가 출범한 뒤 전국 각지에서는 지회 설립 붐이 일어났다. 1928년 3월에는 “신간회 경서(京西)지회 설립대회는 21일 오후 1시부터 시외 공덕리(현재 서울 마포구 공덕동) 예배당에서 성대히 거행”됐다. 이어 동막(東幕·현재 마포구 용강동과 대흥동) 임시창고극장에서는 “동서 일류의 악사 다수를 청하여 기념 음악회”도 열렸다. (조선일보, 1928년 3월 21일) 》

신간회 지회는 대개 행정구역 단위로 조직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점에서 경서지회는 이례적이다. 경성지회가 이미 있는 상황에서 ‘경성의 서쪽’을 내세운 또 다른 지회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1928년 초 마포, 서강, 아현 등지의 청년회가 신년 회합을 열고 신간회 지회 조직에 합의했다. 1월 19일 서강청년회관에서 열린 준비위원회에서는 지회 명칭을 ‘고양서부지회’로 하고, 대상 지역은 고양군 서쪽 면들과 경성 행정구역 중 한강 연안의 조선인 거주 비율이 높은 지역으로 정했다.

그러나 임시 집행부까지 구성했음에도 지회 설립 과정은 순조롭지 못했다. 3월 들어 일부 인사가 ‘경서지회’ 설립준비위원회를 별도로 조직했기 때문이다. 명칭을 둘러싼 논란 끝에 신간회 본부는 경서지회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리하여 3월 21일 ‘경성의 서쪽’이라는 공간적 정체성을 공유한 신간회 경서지회가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대상 지역은 고양군 용강면(龍江面) 일대와 경성의 도화동, 용산역 서쪽의 구용산 가운데 조선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을 포괄했다. 대략 현재의 마포 일대가 그 중심이었다.

1915년 마포도선장의 모습. 한강을 건너기 위해 사람들이 나룻배에 올라타고 있다. 사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1915년 마포도선장의 모습. 한강을 건너기 위해 사람들이 나룻배에 올라타고 있다. 사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마포는 전통적으로 황해도, 전라도, 충청도와 연결되는 한강변의 주요 포구 가운데 하나였다. 수운을 이용해 마포에 도착한 사람과 물자는 만리재를 넘어 남대문을 통과하거나, 애오개(아현고개)를 지나 서소문으로 들어와 한양에 이르렀다. 그만큼 물산이 풍부하고 활기가 넘치는 지역이었다. 19세기 중반 포도청이 밀주를 단속했을 때 마포 인근의 한 마을에서만 술독 87개가 나왔다는 기록도 있다. 그만큼 이 일대에 유통되는 쌀이 많았음을 보여준다. 포구로서 마포의 위상은 철도와 전차가 교통의 중심으로 부상하면서 점차 낮아졌지만, 일제강점기에도 여전히 유지됐다. 1909년에는 나룻배 운영 업자들이 마포도선조합(麻浦渡船組合)을 조직해 상당 기간 활동하기도 했다.마포는 전통적인 교통의 요지였던 만큼 대한제국 말기 근대화 사업과 관련된 공업시설도 들어섰다. 대표적인 예가 1906년 설립된 탁지부 건축소의 연와(煉瓦·벽돌) 제조소다. 근대 시설 건립을 위한 건축자재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세운 공장이었다. 이 무렵에는 마포선 전차도 개통했다. 청량리선, 왕십리선에 이은 세 번째 교외 전차 노선이다. 한강변 부근에 종점을 두고(현재 마포구 BBS불교방송 자리) 10여 개의 정류소를 거쳐 시내와 연결됐다. 전차 선로를 부설하기 위해 새로운 대로도 닦았는데, 현재의 마포대로다.

1933년 경성유람도에 그려진 마포선 전차 노선(파란색). 적십자병원에서 출발한 전차는 마포와 동막을 지나 한강변까지 이어졌다. 사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1933년 경성유람도에 그려진 마포선 전차 노선(파란색). 적십자병원에서 출발한 전차는 마포와 동막을 지나 한강변까지 이어졌다. 사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1930년대 초까지 이 지역 대부분은 경성 행정구역 밖이었지만 전차 선로를 따라 인구가 꾸준히 늘어났다. 일례로 용강면 아현리, 공덕리, 신공덕리의 인구는 1920년과 1930년을 비교하면 두 배 이상 증가했다. 게다가 늘어난 인구의 대부분은 상공업 종사자였다. 1920년대 후반 조사에 따르면 용강면 각 리의 상공업 호수는 90%를 훌쩍 넘은 반면에 농업 호수는 대부분 10% 미만이었다. 말 그대로 용강면은 “경성과 기존 구역 사이에서 방황”하는 지역이었다.(경성부, 1927년 ‘경성도시계획자료조사서’) 당시 언론도 이 지역을 “동대문 밖이나 다름없는 노동자 주택지”(조선일보, 1933년 10월 14일)라고 했고, “농군은 하나도 없고 상업자를 제외하면 전부가 자고 깨면 부내에 들어와서 일하는 사람들”(매일신보, 1934년 4월 8일)이라고 표현했다.

이렇게 일찍부터 ‘도시화’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나타난 사회문제들도 전형적인 도시 문제였다. 1928년 7월 마포 일대에서는 식수 오염과 악취 문제가 발생했다. 마포에 설치된 경성부의 분뇨 탱크에서 분뇨를 몰래 한강에 방류한 사건이었다. 당시 경성부는 전직 관리들이 세운 경성비료회사에 분뇨 처리를 위탁하고 있었다. 회사는 아현에서 마포까지 분뇨 송출관을 설치해 시내에서 배출된 분뇨를 운반했다. 그리고 탱크에 일정량 이상의 분뇨가 모이면 이를 비료로 만들어 판매했다. 그런데 회사가 처리 능력 이상의 분뇨를 무단 방류하면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당연히 주민들의 항의도 거셌다. 불만은 두 갈래였다. 첫 번째는 주민들이 식수로 이용하는 한강에 분뇨를 무책임하게 방류한 회사의 행태를 향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불만은 도심부의 위생 상태를 유지하는 대가로 상수도 설비도 제대로 없는 외곽 지역에 분뇨 탱크 같은 ‘혐오시설’을 설치한 경성부의 차별적 행정을 겨냥했다. 주민들은 경성부와 경성비료회사가 책임을 서로 미루며 해결책을 내놓지 않자 “분뇨탱크로 하여 음료수를 먹지 못하게” 된 점을 경성부에 진정하고 “불일간 주민대회”를 열어 마포분뇨탱크 철폐기성회까지 조직하기로 결의했다.(동아일보, 1928년 7월 20일)

비슷한 시기에 전차요금 문제도 불거졌다. 처음 전차가 부설됐을 때 경성의 전차요금은 일정한 간격으로 구역을 나눠 1구역마다 3전씩 받았다. 그러나 1919년 요금체계를 단순화하면서 동대문과 남대문을 경계로 요금 구역을 둘로 나누고, 1구역 시내선은 균일하게 5전, 2구역 교외선으로 환승할 때는 5전을 추가로 받도록 개정했다. 이에 따라 용산선, 마포선, 청량리선, 왕십리선 등 교외 전차의 요금은 모두 10전이 됐다. 그런데 1921년 경성전기회사가 용산 지역 유지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경성 행정구역 안이라는 명분으로 용산선을 1구역에 포함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상대적으로 일본인이 많이 사는 용산은 1구역인 데 비해 다른 지역은 2구역이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단지 요금 차이를 넘어 민족 차별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었다.

1928년 9월 마포에서는 전차요금 통일 문제를 놓고 주민대회가 열렸다. 신간회 경서지회도 여기에 적극 개입했다. 주민대회에서는 요금 문제뿐만 아니라 그동안 마포 주민들이 느끼고 있던 다양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에 따라 “전차임금은 시내외를 1구역제로 통일할 것” “시간을 촉진시키기 위해 복선을 부설할 것” “공장 노동자에게 할인 승차케 할 것” “기점, 종점에 대합소를 설치할 것” “시외선에도 살수차를 설비할 것” 등 다양한 요구 사항을 채택했다.(동아일보, 1928년 9월 18일)

이후에도 주민들의 전차요금 통일 요구가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계속되자 경성전기회사는 1930년대 초 아예 교외 전차를 폐지하고 이를 버스로 대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반발해 교외선 폐지 반대 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결국 경성전기회사는 1933년 교외선을 유지하기로 하고, 전차요금 구역제는 폐지하지 않았지만 2구역 요금을 10전에서 8전으로 인하했다. 교외선 폐지 반대 운동은 부분적인 성공을 거둔 셈이다.

전통적으로 마포는 전국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서쪽의 현관 같은 곳이었다. 일제강점기에도 이런 이미지는 이어졌다. 마포는 경성에서 편의상 분리된 고양군의 한 지역이라기보다 어디까지나 ‘경성의 서쪽’이었던 것이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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