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의원(하원) 선거를 앞두고 일본 정치권에서 현금 지원, 소비세 감세 등 대규모 재정 지출 요구가 쏟아진 2021년. 당시 재무성 차관이던 야노 고지는 ‘이대로는 국가 재정이 파탄한다’(분게이슌주 2021년 11월호)는 기고문에서 정치권의 선심성 돈풀기 경쟁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일본에서 직업 공무원이 공공연하게 정치권에 이견을 드러낸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일본은 타이태닉호"
야노는 기고문에서 일본을 북대서양에서 침몰한 타이태닉호에 비유했다. 타이태닉은 충돌 직전까지 빙산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일본은 빙산(국가부채)을 알고 있지만, 안개 탓에 잘 보이지 않아 충돌을 피하려는 긴장감이 느슨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당시 집권 자민당 정책 책임자인 다카이치 사나에 정조회장은 ‘바보 같은 얘기’라며 노골적으로 날을 세웠다.
다시 선거의 계절. 일본 정치권은 7월 참의원(상원) 선거를 앞두고 이번에도 소비세 인하 공약을 들고나왔다. 식료품 소비세율(8%)을 최대 0%로 낮추자고 주장하고 있다. 식료품 소비세를 없애면 연간 약 5조엔의 세수가 감소할 것이라는 게 재무성 추산이다. 일본 세수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소비세는 사회보장제도를 지탱하는 핵심 재원이지만, 정치권은 감세에 따른 재원 대책에 말이 없다.
일본의 재정 환경은 2021년보다 더 악화하고 있다. 오랜 기간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 물가와 금리가 오르는 탈디플레이션 경제로 전환하고 있어서다. 미국 경제학자 에브시 도마의 정리에 따르면 명목 성장률이 명목 이자율을 웃돌 경우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는 억제할 수 있지만, 반대라면 관리가 불가능해진다.
2010~2011년 그리스의 ‘소버린 리스크’(국가부도 위기)에서 경험했듯, 재정난을 틈탄 국채 매각은 순식간에 국가 존립 위기로 이어진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지난 19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일본의 재정 상황에 대해 “그리스보다 나쁘다”고 강조한 것은 이 때문이다.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재원 대책 없는 감세’의 결과는 2022년 ‘트러스 쇼크’가 잘 보여준다. 리즈 트러스 당시 영국 총리가 발표한 재원 대책 없는 감세 정책은 즉시 주가 하락, 국채 가격 급락(금리 급등), 파운드화 약세를 불러왔다. 채권자경단의 실력 행사에 트러스는 44일 만에 사임하며 영국 역사상 최단명 총리로 기록됐다.
경고 울리는 것은 시장뿐
일본 채권시장도 경고음을 울렸다. 결국 적자 국채 발행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한 채권 투자자들은 대표적 안전자산인 일본 국채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최근 30년·40년 만기 국채 금리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한 것은 이 때문이다. 앞으로 국채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일만 남았다. 그다음은 국가신용등급 강등이다. 최근 미국마저 국가부채가 불어나 신용등급이 깎이는 수모를 당했다.
한국에도 나랏빚을 걱정하면 바보 취급하는 정치인들이 있다.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이 아직 낮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급격한 저출생·고령화로 나랏빚 증가 속도가 어느 나라보다 빠르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정치권이 재정 포퓰리즘에 기울 때마다 경고를 울리는 것은 시장뿐이라는 사실은 한심할 따름이다. 한국판 채권자경단의 경고를 받았을 땐 이미 늦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