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첫해인 1950년 11월 말 유엔군으로 참전한 튀르키예 병사 술레이만 딜빌리이는 북한군 폭격에 부모를 잃고 우는 다섯 살 소녀를 발견했다. 폐허 속 눈밭에 웅크리고 있는 아이는 변변한 옷도 걸치지 못한 채 얼어붙은 손을 떨고 있었다. 부모와 자기 이름마저 기억하지 못했다. 술레이만은 조심스레 다가가 두려움과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닦아주며 조끼를 벗어 어깨를 감쌌다.
그러고는 아이의 동그란 얼굴을 보고 ‘아일라’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튀르키예어로 ‘달’이라는 뜻이었다. 아일라는 그를 ‘바바’(아빠의 튀르키예어)라고 부르며 졸졸 따라다녔다. 군화 발걸음 소리만 들려도 이내 달려갔다. 술레이만은 소녀를 품에 안고 빵을 나누며 천막 구석에 작은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담요를 잘라 코트를 만들고 틈틈이 사진을 찍어줬다. 다른 병사들도 “우리의 딸”이라며 함께 보살펴주었다.
'형제의 나라' 넘어 '부모의 나라'
휴전 무렵 귀국 명령을 받은 술레이만은 아일라를 상자에 몰래 넣어 데려가 딸로 키우려고 했다. 하지만 계획은 실패했고 둘은 이별해야 했다. 아일라는 얼마 뒤 튀르키예군이 고아를 위해 경기 수원시에 세운 ‘앙카라학교’에 맡겨졌다. 여기에서 ‘김은자’라는 한국 이름을 얻었다. 두 사람은 2010년 국내 한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60년 만에 재회했다. 바바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스탄불에 있는 그의 집도 방문했다. 그곳엔 6·25전쟁 때 찍은 아일라 사진이 빠짐없이 간직돼 있었다.
이들의 얘기는 튀르키예에서 2017년 ‘아일라’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관객 500만 명을 불러 모았다. 그해 바바는 92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눈물겨운 서사는 한 아이와 한 병사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10만 전쟁 고아의 얼굴이자 수많은 이름 모를 군인의 이야기였다.
아일라가 자란 앙카라학교 이름은 튀르키예 수도에서 따왔다. 이 학교는 1951년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에서 ‘앙카라학원’으로 출발했다. 군인들은 난리통에 부모를 잃은 아이를 하나둘 보호하다가 점차 극빈 가정 아동까지 껴안았다. 아이들은 초등학교 4학년 과정을 마친 뒤 인근 학교로 진학했다. 튀르키예군이 완전히 철수한 1966년까지 이곳에서 자란 고아는 640명이 넘는다.
이들에게 튀르키예는 ‘형제의 나라’를 넘어 ‘부모의 나라’다. 한 아이는 훗날 “그들이 입혀준 옷은 군복을 잘라 만든 것이었지만 어떤 비단옷보다 따뜻했다”며 “군인들이 풍차 모양 놀이기구를 만들어주고 아이들이 다니기 편하게 자갈길을 깔아준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수원시는 이곳에 ‘앙카라길’이라는 명예도로명을 부여하고 길 한쪽을 튀르키예군과 전쟁 고아를 그린 벽화로 장식했다. ‘앙카라학교 공원’까지 꾸몄다.
이보다 더 많은 고아를 구출한 사연도 뭉클하다. 1950년 12월 중공군 개입으로 전세가 급변해 서울이 다시 함락될 위기에 놓였다. 미국 군목(軍牧) 러셀 블레이즈델 중령은 애가 탔다. 지금 돌보고 있는 고아 1000여 명을 어찌할 것인가. 백방으로 수소문하던 그는 배편을 마련해주겠다는 군 관계자의 연락을 받고 사흘에 걸쳐 인천까지 트럭으로 아이들을 실어 날랐다. 그러나 기다리던 배는 100명도 탈 수 없는 초라한 규모였다. 그새 8명이 독감과 백일해로 숨졌다.
좌절에 빠진 블레이즈델 중령은 공군 작전참모 터너 로저스 대령에게 매달렸다. 우여곡절 끝에 일본 오키나와 기지를 출발한 C-54 수송기 16대가 김포공항에 도착했고, 숱한 난관을 헤치고 전쟁 고아 1000여 명이 제주공항으로 무사히 이송돼 크리스마스를 맞았다. 이른바 ‘유모차 공수작전’으로 불린 이 ‘기적’으로 블레이즈델 중령은 한국판 ‘쉰들러 리스트’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는 이 작전 때문에 명령 불복종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되기도 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했던 일이다. 내 임무가 죽음에 내몰린 아이들을 죽게 놓아두는 것이라면 곧바로 전역하겠다”고 말했고, 재판장은 그를 처벌하지 않았다. 당시 제주에 도착한 아이들은 ‘제주 고아원’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중 몇몇은 입양되고 몇몇은 성장한 뒤 사회복지사가 됐다. 이들은 지금도 자신을 안아준 군목의 얼굴을 생생히 기억한다.
전투 수당 모아 고아 돌본 병사
또 다른 사연은 아프리카에서 온 에티오피아군 이야기다. 1951년 7월 참전한 에티오피아 황실 근위대 ‘강뉴부대’는 그해 9월 강원도 화천 적근산 전투와 이듬해 10월 ‘철의 삼각지’ 공방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53년 7월 정전 때까지 연인원 3518명이 참전해 124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부상했다.
그 와중에 병사들은 전투 수당을 모아 1953년 경기도 동두천에 ‘보화원’이란 이름의 보육원을 세우고 전쟁 고아를 보살폈다. ‘보화’(Bowha)는 암하라어로 ‘신의 은혜’란 뜻이다. 부대원들은 전투와 교대로 아이들을 돌보았다. 말도 통하지 않는 아이들과 눈을 맞추며 밥을 떠먹이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들이 어깨에 멘 총보다 아이를 안은 팔이 더 강해 보였다. 이들은 1956년까지 전후 복구를 도우며 평화를 지켰다.
그 시절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릴 때마다 병사들은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그들의 품에 안긴 아이들은 전장의 딸이자 아들이었고, 그들은 전장의 아버지였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따뜻이 손을 내밀고 마음을 열며 이름을 불러준 그 모습은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전쟁의 또 다른 얼굴이다.
현충일을 앞둔 지금 포연이 자욱한 전장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안고, 노래를 가르치고, 생명의 씨앗을 품어준 이들을 생각하며 다시 그 이름을 부른다. 아일라, 김은자, 바바 술레이만, 블레이즈델 중령, 앙카라학교의 이름 모를 병사들, 보화원에서 잠든 아이들…. 전쟁은 많은 것을 앗아갔지만 그들의 인간애는 살아서 더욱 빛난다. 포화 속에서 움튼 작은 사랑의 불씨, 그것은 바로 우리가 지켜야 할 평화의 씨앗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