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대통령과 국방장관, 전군 지휘부가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는 건 전례를 찾기 힘들다. 그 자체가 중대한 안보 위협이기 때문이다. 지휘관들이 세계 각지의 군사기지를 비워두는 것도 문제지만 군 수뇌부가 한 건물에 있으면 미국을 노리는 테러 세력에게 그만한 기회가 없다. 그런 위험까지 무릅쓰고 왜 회의가 소집됐는지 며칠 전부터 관심이 쏠렸다. 트럼프 2기 출범 후 고위 장성들이 줄줄이 해임된 걸 고려할 때 히틀러가 1934년 독일군 장군들을 모아놓고 충성 맹세를 요구했던 것과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1500개의 별들 앞에 선 헤그세스 장관은 이발과 면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턱수염과 긴 머리를 해선 안 되고, 뚱뚱한 군인들도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중대장이 병사들에게 할 법한 내무생활 훈시였다. 잔뜩 군기를 잡았지만 정작 본인은 예멘 후티 공습 관련 기밀 정보를 개인 메신저로 가족들에게 유출한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 야전에서 잔뼈가 굵은 백전노장들은 주 방위군 소령으로 잠시 근무했던 헤그세스 장관의 정신교육을 묵묵히 들었다. 그런 얘기였으면 그냥 이메일로 보내는 게 나았을 것이라고 미 언론은 지적했다.
▷무대에서 바통을 이어받은 트럼프는 불법 이민 단속을 자화자찬하면서 장군들에게 미국 내부로부터의 전쟁에 나서자고 했다. 단속 반대 시위대를 적으로 규정하고,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뉴욕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등 대도시들을 군대 훈련장으로 사용하라고도 했다. 트럼프는 “내 말이 마음에 안 들면 나가도 된다”면서도 “물론 그러면 당신들의 계급과 미래가 사라지겠지만…”이란 단서를 붙였다. 내 정책에 따르기 싫으면 알아서 옷을 벗으라는 경고로도 들리는 말이었다.▷이날 회의는 트럼프와 헤그세스의 정치 토크쇼에 가까웠다. 세계 최강 군대의 지휘관들을 앉혀놓고 정신교육 하는 것 자체로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 것 같다. 하지만 트럼프 마음대로 안 된 게 있었다. 2시간이 넘는 연설 내내 830여 명의 장군들은 단 한 번도 박수를 치지 않았고 시종일관 무표정했다. 미 언론에선 사실상의 묵언 저항이란 평가도 나왔다. 트럼프가 “이렇게 조용한 방에 있는 건 처음”이라고 했을 정도다. 군 경험이 일천한 국방장관과 군 미필인 대통령의 모욕적 언사 앞에서 평정심을 지키는 게 장군들이 치른 ‘내부’와의 전쟁이었을 것이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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