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장관 ‘두 국가론’ 놓고 현실성 따져 묻자
해묵은 ‘자주 대 동맹’ 갈등 재연되는 양상
오늘날 자주는 전략적 자율성 확보의 문제
급변하는 국제정세, 한가한 논쟁 벌일 땐가
2004년 9월,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이 작성한 ‘용산기지 이전 협상 평가 보고서’가 유출됐다. 이 기밀 보고서에는 기지 이전 협상이 미국 측 요구에 지나치게 수용적이며, 불평등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협상을 주도한 ‘동맹파’는 ‘자주파’가 자신들을 공격하려고 일부러 기밀을 흘렸다고 의심했고, 자주파는 동맹파가 지나치게 친미적이라고 반발했다. 양 진영은 이 외에도 이라크 추가 파병을 비롯해 사안마다 충돌했다.
문재인 정부 시절에도 ‘한미 워킹그룹’을 놓고 자주파와 동맹파는 뚜렷한 견해차를 드러냈다. 자주파는 워킹그룹이 남북 교류·경협 추진 과정에서 미국의 눈치를 보게 만드는 불필요한 구조라고 비판한 반면, 동맹파는 독자적 남북관계 추진이 초래할 수 있는 제재 위반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워킹그룹을 필수적인 한미 조율의 틀로 평가했다.
이에 비해 지금 이재명 정부 내에서 벌어지는 논쟁은 과거 진보 정부에서 반복되던 자주파와 동맹파의 이념적 충돌과는 다소 성격이 다르다. 과거의 논쟁은 실제로 ‘자주냐, 동맹이냐’라는 이념적 정체성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지금은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제안하는 대북정책의 정책적 효과와 전략적 리스크를 둘러싼 실효성 논쟁으로 시작했다.정 장관의 ‘두 국가론’은 남북관계가 적대적으로 굳어진 원인을 한국의 비현실적 집착에서 찾는다. 한국이 남북 특수관계와 통일을 고집했고, 북한은 이를 위협으로 받아들여 관계가 적대적으로 됐다는 해석이다. 따라서 이러한 집착을 내려놓는다면 남북관계가 평화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진보 정부가 통일을 아주 먼 미래의 과제로 미루고 ‘평화 공존’을 앞세우며 화해의 제스처를 보냈던 시기에도 남북관계는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돌아온 것은 결국 김정은 일가의 거친 언사와 위협, 그리고 되풀이된 핵·미사일 도발이었다.
적대와 불신이 남북 특수관계와 통일정책에서 비롯됐다는 진단은 틀린 진단이다. 따라서 특수관계와 통일을 정책에서 지워 두 국가 체제로 평화를 얻겠다는 처방 역시 틀릴 수밖에 없다. 김정은에게 최대 위협은 한국의 통일정책이 아니라 더 부강하고 자유로운 한국의 존재 그 자체일 것이다. 문화 교류나 경협 등 자주파가 원하는 낮은 단계의 접촉만으로도 결국 한국을 향한 구심력이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을 김정은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이 ‘두 국가론’에 반대하는 이유는 단순히 동맹 중시 때문이 아니다. 현재 상황에서 이를 채택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정책적 혼선과 북한의 전략적 프레임에 휘말릴 위험성을 경계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도 정 장관의 대북정책을 놓고 빚어진 현실성과 위험성 논쟁에 자주파의 원조 격인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대통령 주변에 동맹파가 너무 많다”라며 인적 개혁을 요구하고 뛰어들면서, 이미 시대적 맥락을 상실한 ‘자주 대 동맹’ 갈등이 재연되고, 전선은 점점 확장되는 양상이다. 한국의 외교안보는 해묵은 갈등에 빠져 있을 만큼 한가한 처지가 아니다. 자주 대 동맹 구도는 1990년대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한국의 외교안보 논쟁을 규정하던 틀이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국제 정세와 한국이 직면한 복합 위기를 고려하면 이미 한참 철 지난 프레임이다.국제 정세가 요동치는 가운데, 북한은 지금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가 이끄는 권위주의 진영의 전면에 서기로 전략적 결단을 내렸으며, 그 결단의 연장선에서 적대적 두 국가론을 이해해야 한다. 한국에 무엇인가를 기대해서 내린 결정이 아니니, 희망적 사고에 빠지지 말고 북한의 의도를 정확히 읽어야 한다.
‘자주’라는 개념이 북한과의 협력이나 남북관계 복원을 통한 주도권 확보를 의미해야 한다면, 그것은 이제 낡은 틀이다. 오늘날의 ‘자주’는 국제사회 속에서 한국이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해야 하며, 이는 전략적 자율성 확보의 문제다. 북한과의 관계 설정과는 별개의 차원에서 다뤄져야 할 과제다. 동맹만으로도 생존을 담보할 수는 없다. 자강(自强)과 전략적 자율성 확보는 병행돼야 할 과제다. 국제 정세가 급변하는 지금, 자주 대 동맹이라는 낡은 프레임은 전혀 실용적이지 않다.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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