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이라면 자신의 이름이 붙은 ‘독트린’(원칙)을 갖고 싶어 한다. 제임스 먼로 전 미국 대통령이 자신의 이름에 처음으로 독트린을 붙인 후 대부분의 미국 대통령은 일관성 있는 외교 정책의 청사진을 보여주는 원칙을 확립하려고 했다.
대통령의 독트린은 수사적이면서도 경험적이다. 미국 행정부의 의도를 담은 연설에서 나타나고 대통령의 행동으로 실행된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은 1985년 국정 연설에서 “자유 투사에 대한 지원은 곧 자기(미국) 방어”라고 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니카라과 마나과까지 반공주의자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이를 입증했다.
일관성 없는 트럼프
트럼프 독트린을 규정하는 건 어렵다. 수사적으로 또는 경험적으로 일관성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적어도 다음 세대까지 미국이 직면할 가장 큰 전략적 질문을 해보자. 우리는 중국과 디커플링(분리)을 추구하는가. 한 달 전만 해도 관세 전쟁으로 미·중 협력은 끝난 듯했다. 그러나 지난주 중국과 휴전한 트럼프 행정부는 다시 베이징과의 기회를 적극 홍보하고 있다. 우리는 지난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가장 명확한 트럼프 독트린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익숙한 ‘협상가 트럼프’였다. 전에 없던 거래 규모를 보여줬다. 그의 입장에선 분명 큰 성공이었다.
해외 권력자들과의 약속에서 실현 가능한 약속과 거짓말을 구분하기 어렵다. 모든 미국 대통령은 해외 방문 중에 체결한 거래의 가치를 과장하게 마련이다. 백악관이 주장한 2조달러의 ‘엄청난 거래’를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다만 미국 경제를 위해 유익한 거래를 몇 개 따낸 것은 사실이다.
‘무역은 국기를 따른다’는 영국 제국주의 전성기의 외교 독트린이었다. 외교적 목표를 추구하면 상업적 기회가 따라온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접근법은 이를 뒤집은 것으로 보인다. ‘국기가 무역을 따른다.’
'물질적 현실주의'의 한계
그의 정확한 비전은 리야드 연설에서 나왔다. 이상주의를 버리고 국익을 위해 경제를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물질주의와 외교 현실주의의 보기 드문 조합이다. ‘물질적 현실주의’라고 부를 만하다. 그 배경에는 나름대로 논리가 있다. 미국 전임 대통령들이 추구한 고상한 이상주의가 두 번이나 실패했다는 그의 지적은 틀리지 않다. 역대 미국 대통령은 중동에서 더 큰 자유와 평화, 미국의 안보를 목표로 했지만 달성하지 못했다. 실패한 이상주의를 포기하고 돈을 좇는 것은 어떤가. 이는 미국 경제력을 키울 뿐만 아니라 우리의 글로벌 전략적 이익에도 기여할 수 있다.
물질적 현실주의의 위험은 경제적 이익과 국가 전략적 이익이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최근 이란의 긴장 완화를 위한 미국의 노력을 보자. 이란과 가까워지려는 사우디를 돕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시리아 대통령을 만난 것도 그렇다. 몇 년 전 그는 미국을 상대로 테러를 벌였다. 이것 역시 사우디가 원하는 것이었다. 이런 결정들로 중동과 미국이 더 안전해질까. 허황한 이상주의가 분명 대가를 치르긴 했지만 그렇다고 돈으로 평화와 안보를 살 수는 없다.
원제 ‘Call the Trump Doctrine Mater-Real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