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노인 ‘지갑’ 속에 154조 원[횡설수설/우경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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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가 찾아오고 인지 능력이 떨어지면 내 집도, 내 돈도 내 것인 줄 모르게 된다. 이렇듯 치매 환자가 스스로 쓸 수 없는 돈, 팔 수 없는 재산을 ‘치매 머니’라고 한다. 요즘 상속 분쟁은 치매 머니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치매 걸린 아버지와 합가해 오랜 기간 모셨는데 유언의 효력이 인정되지 않아 집을 빼앗길 처지에 놓이기도 하고, 반대로 허울뿐인 간병을 내세워 재산을 야금야금 빼돌린 형제와 법적 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지인에게 사기를 당하거나 간병인에게 횡령을 당한 재산을 찾으려는 분쟁도 자주 발생한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우리나라 치매 노인이 보유한 부동산, 현금 등 자산을 처음으로 조사했다. 약 154조 원에 달한다. 만 65세 이상 치매 환자 가운데 약 76만 명이 자산을 보유하고 있고, 그 규모가 1인당 평균 2억 원이었다. 고령화에 가속도가 붙으며 치매 머니도 10년마다 130조 원씩 늘어날 것으로 전망됐다. 2050년에는 488조 원으로 급증해 그해 예상 국내총생산(GDP)의 15%를 넘어선다. 잠자는 돈이 많아지면 국가 경제의 활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치매 머니는 우리보다 앞서 고령화를 겪은 일본에서 등장한 용어다.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사망한 치매 환자의 통장에 1억 원이 넘는 현금이 있었다는 이야기며, 치매 부모의 자산이 동결돼 자녀가 간병비를 대다 파산했다는 등 안타까운 사연들이 넘쳐난다. 일본의 65세 이상 치매 환자가 보유한 치매 머니 규모는 2000조 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정부는 치매 노인의 자산을 지키기 위해 공공후견인, 공공신탁제도 등을 활성화하겠다고 한다. 법원이 법적 후견인을 지정하는 공공후견인 제도는 존재하지만 이용률은 저조하다. 최근 7년간 법원에 후견인 지정을 청구한 건수가 680건뿐이었다. 아직 제도가 잘 알려지지 않은 탓도 있지만 부모님 통장에서 간병비를 인출할 때 금액이 크면 법원의 허락을 일일이 받아야 하는 등 불편한 점이 많다. 책임은 크고 활동비 지원은 적어 후견인을 하겠다는 사람도 없다. 치매 환자는 정부나 공공기관이 자산을 관리해 주는 공공신탁 제도의 대상도 아니다.

▷이미 노인 인구가 1000만 명을 넘어섰다. 일본은 비영리법인, 은행 등이 복지 서비스 차원에서 치매 환자의 자산 관리를 해주고, 싱가포르는 저렴한 비용으로 공공신탁 제도를 이용하도록 했다. 우리도 치매 환자 자산을 관리할 제도적 장치가 시급하다. 무엇보다 평생 아끼고 모은 돈이 꽁꽁 묶이거나, 남 좋은 일만 시키게 된다면 그보다 억울한 일도 없다. 고령화 시대에는 노후 재테크의 개념도 바뀌어야 한다. ‘다 쓰고 가라(Die with Zero).’ 돈을 쌓아두기보다 소비하는 것이 나도 위하고, 자식도 돕는 방법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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