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태권 브이와 '영혼 없는 공무원'

12 hours ago 2

입력2025.07.04 17:36 수정2025.07.04 17:36 지면A23

[천자칼럼] 태권 브이와 '영혼 없는 공무원'

2008년 1월 이명박 정부 출범을 앞두고 열린 인수위원회 업무보고. 김창호 당시 국정홍보처장은 노무현 정부의 기자실 운영 방식을 질타하는 인수위원들에게 “우리는 영혼이 없는 공무원”이라고 토로했다. 대통령이 밀어붙이는 정책에 어떻게 반기를 들겠냐는 하소연이었다. 이 표현을 처음 쓴 인물은 20세기 초 독일의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다. 그는 군주제의 문제점을 꼬집으며 전문가 집단인 관료를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관료라면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한다는 뜻에서 “영혼이 없어야 한다”는 표현을 썼다.

한국에서 ‘영혼 없는 공무원’은 줏대 없는 관료와 비슷한 말로 쓰인다. 관료들도 논리가 궁하거나, 자신들을 비하할 때 이 관용구를 꺼내 든다. 2010년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중소기업 감세안을 반대하던 기재부가 왜 갑자기 찬성으로 돌아섰느냐”는 국회의원들의 질문에 “그래서 공무원은 혼이 없다고 하지 않느냐”고 답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그제 기자회견에서 “직업 공무원들은 국민의 주권 의지를 대행하는 지휘관에 따라서 움직이는 게 의무”라며 공직사회를 ‘로봇 태권 브이’에 비유했다. “조종간에 철수가 타면 철수처럼 행동하고 영희가 타면 영희처럼 행동한다. 그걸 해바라기라고 비난하면 안 된다”는 설명이었다. 양곡법 개정안을 반대한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을 둘러싼 갑론을박을 의식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송 장관은 취임 직후 현 정부의 정책 기조를 따르겠다며 입장을 선회했다.

하지만 공무원을 로봇에 비유한 것은 지나친 감이 있다. 관료는 정책의 경험과 지식을 축적하는 전문가 집단이다. 선출권력은 지식과 관계없이 뽑히지만 관료는 시험으로 뽑는다. 헌법이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한 것은 이들의 전문성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한 것이다. 공무원이 국정 기조를 잘 뒷받침해달라는 취지를 넘어 “무조건 선출권력을 따르라”는 식의 명령은 자칫 행정부를 입법부의 시녀로 만들려고 한다는 오해를 빚을 수도 있다.

송형석 논설위원 click@hankyung.com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