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플라자 합의, 한국에서 재연된다면[기고/심승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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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승규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 국제정치경제학부 교수

심승규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 국제정치경제학부 교수
1985년 ‘플라자 합의’에 트라우마가 있는 일본은 미국과 관세 협상을 하기 전부터 인위적 엔고가 협상 테이블에 오를까 노심초사했다. 반면 한국은 미국과 원화 가치를 낮추는 개입을 자제하고, 기획재정부와 미 재무부 사이에 협의체를 구성해 환율을 관리하기로 덜컥 합의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이에 지나치게 둔감하다.

플라자 합의는 1985년 9월 22일 미국과 일본, 서방 선진국 재무장관들이 미 뉴욕 플라자호텔에 모여 달러화의 상대 가치를 낮추는 방향으로 각국의 환율을 관리하기로 한 합의다. 이후 엔화 환율은 그해 달러당 248엔에서 1987년 128엔으로 떨어졌다. 불과 2년 만에 일본산 제품 가격은 두 배로 급등했다. 가격 경쟁력을 되돌릴 수 없다는 절망은 제조업 투자 의욕마저 꺾었고, 일본 내 제조업 기반이 약화됐다.

엔화 표시 자산 가치 급등으로 개인과 법인 모두 해외 직접투자에 나섰고, ‘와타나베 부인들’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그러나 해외 투자로 벌어들인 소득은 해외에 재투자돼 일본 내 경제 순환을 악화시켰다. 유동성 부족에 신음하는 빈익빈과 자산 가격 거품을 즐기는 부익부가 심화됐고, 일본은행의 저금리 정책은 오히려 글로벌 헤지펀드들의 ‘엔 캐리 트레이딩’에 기름을 부었다.

1989년 자산 가격 거품 우려로 일본은행이 긴축으로 전환하자 거품경제는 급격히 붕괴됐다. 1991년 저축은행에서 부실 사태가 터지며 일본 경제는 ‘잃어버린 20년’이라는 장기 불황에 빠졌다. 자산 가치가 폭락하고, 실물 부문 투자도 말라버린 기현상이 20년 이상 지속됐다. 이런 배경에서 일본은 플라자 합의를 경제에 투하된 원자폭탄이었다고 평가하고, 그 합의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가 지배적이다.

최근 관세 협상에서 미국은 다시금 약달러를 목표로 한다. 일본은 점진적으로 정책금리를 올리고 유동성을 흡수하려 한다. 일본의 추세적 엔고와 미국의 약달러는 방향성이 일치한다. 자칫 엔고 추세를 가속했다가는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으로 미 금융시장이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에 미국도 굳이 가속화를 원치 않는다.

반면 우리는 경기 침체 우려로 금리를 점진적으로 낮추려 한다. 서로 다른 방향을 보고 있기에 미국이 우리와의 협상에서는 환율 관리 방향과 협의체 구성을 관철시킨 듯하다.

혹자는 플라자 합의에서처럼 단기간 환율 조정 폭이 크지는 않을 것인 만큼 우리 경제에 큰 충격은 없을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 경제 곳곳에서 이미 유동성 부족과 실물 경기 부진의 신호가 나타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엔화 가치만큼 원화 가치가 급격히 상승하지 않더라도 확장적 통화정책이 제약되면 현재 역전된 한미 금리 차로 인해 국내 유동성이 마르면서 소상공인 등 경제적 취약계층부터 무너질 수 있다. 6·3 대선에서 후보들은 저마다 장밋빛 청사진을 약속하고 있다. 하지만 차기 대통령 재임 기간 우리 경제 전망은 밝지 않다. 심각한 가계부채 문제를 안고 있는 상황에서 화폐 공급을 늘리면서 원화 가치를 높게 유지해야 하고, 미국에 투자하면서 국내 설비 투자도 활성화해야 하는 모순적인 과제에 직면했다. 플라자 합의 후 인위적 엔고를 유도했던 일본 정부의 안일했던 판단과 그로 인한 후폭풍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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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승규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 국제정치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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