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서는 4월 12일까지 동시대 미술 주요 한국 작가 22인의 신작을 선보이는 그룹전 《UNBOXING PROJECT: Message》가 열리고 있다. 홍보를 위한 문구로 ‘대표적 한국 작가’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이 전시는 국수주의적 분류를 넘어 특정 국가의 미술을 소개하기보다 예술이 시공간을 초월해 전달하는 메시지와 그 틀을 탐구하는 데 초점을 둔다.
이번 전시의 공동 기획자로서 전시의 다층적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전달하고자 세 가지 큐레토리얼적 접근을 중심으로 전시를 소개하려 한다.
<UNBOXING PROJECT>는 2022년 시작된 이후 스펙터클한 대규모 작품이 주는 감탄 대신, 가까이 다가가야 보이는 작은 작품의 감동을 관객과 공유하는 데 주목해왔다. 이 프로젝트에서 선보이는 작품들은 작은 박스에 들어갈 정도의 크기로 제작된다. 이러한 접근을 통해 관객이 세밀한 시각적·감각적 탐색을 즐기며 친밀한 감성적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또한 전시는 작은 작품도 독립적인 예술적 서사를 구축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서울과 로스앤젤레스에서의 전시들에 이어 다섯 번째로 열리는 이번 전시는 특별히 전시 공간의 역사적 맥락과 작품의 틀을 연결하였다. <UNBOXING PROJECT>는 매번 다른 주제와 고유한 형식을 제공하며 참여작가들에게 이를 기반으로 한 신작을 의뢰해왔다. 이번 전시는 공압우편(편지를 파이프에 넣어 공기압력으로 전달하는 방식)의 중심지였던 베를린의 구(舊) 전신국 건물에 위치한 갤러리에서 열리며, 커뮤니케이션의 역사와 예술적 메시지 전달 방식이 맞닿는 지점을 탐구한다.
이를 위해 작품을 보관하는 상자는 공압우편에서 영감을 받아 원통형 케이스로 제작되었고, 그 안에 담기는 두루마리 족자가 이동하고 펼쳐지는 방식으로 예술적 메시지의 전달 과정을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더 나아가 전시에 사용된 동일한 틀은 참여작가들의 서로 다른 독창적 예술 세계를 더욱 두드러지게 보이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마지막으로 《UNBOXING PROJECT: Message》는 참여작가의 신중한 선정을 통해 프로젝트의 실험적 접근을 구체화했다. 단순히 유명하거나 영향력 있는 작가를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크기의 작품 안에서도 자신의 예술세계를 응축해 표현할 수 있는 작가들, 전시의 주제와 도전적인 틀에 적극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작가들로 면밀히 선정했다. 이는 예술가들이 제한된 형식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조형 언어를 구축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원로작가 민정기, 성능경을 비롯해 안규철, 도윤희, 이슬기, 함경아 등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중견작가들과 함께 김지영, 문성식, 박광수, 박그림, 박예림, 마이아 루스 리, 유예림, 이은실, 장종완, 최윤희 등 젊은 세대 작가까지 포함한 총 22명이 전시에 초대됐다. 그 결과 제작된 신작 22점은 참여작가들의 다양한 시각과 예술 세계를 응축해 담아내고 시대를 초월하는 예술적 소통을 재현한다.
일부 작품을 소개하자면, 도윤희는 내면의 풍경을 추상적으로 시각화해 언어로 형용하기 어려운 감각과 관념을 캔버스 위에 옮겼고, 마이아 루스 리는 자신의 이주 경험에서 출발한 조각 연작 <Bondage Baggage>를 캔버스 위에 찍어내 자취를 남기며 이동·디아스포라·공동체·경계 등의 주제를 탐구한다. 김지영은 촛불의 따스한 빛과 생명력을 화폭에 담아 불확실한 시대에도 존재하는 인간 회복력을 시적으로 표현하며 미래 세대에게 희망을 전하고, 박그림은 불교 회화의 ‘원이삼점(圓伊三點)’ 모티프를 차용하여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역사적 맥락을 바탕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작품들도 함께 소개된다. 안규철은 과거 독어권 문학의 대표적 시인 파울 첼란(Paul Celan)의 시 구절을 작품에 인용하고 시구에 묘사된 듯한 이미지를 연결해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를 부유하는 ‘글-그림’을 선보인다. 함경아는 작품의 매체로 사용한 와인와 자수에 내재된 역사·정치·문화적 서사를 교차시키며 사라지고 변화하기에 불안이 깃든 삶과 현실에 대해 사유한다.
김수영은 구 정동 MBC 방송국과 베를린의 전화국 건물의 외연, 불분명한 시간대의 하늘 이미지를 결합해 재현과 기하학, 추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각적 메시지를 구성하고, 민정기는 안견의 <몽유도원도>(1447)에서 영감을 받아 과거와 현재의 풍경을 하나의 화면에 중첩해 특유의 공시적 시각을 구축한다. 이슬기는 전신국이라는 역사적 공간과 공명하며 1799년 공압우편을 개발한 엔지니어 윌리엄 머독(William Murdoch)과 시대를 초월해 나눈 대화를 화면에 담았다.
《UNBOXING PROJECT: Message》는 공압우편 시스템이라는 소통 매체의 역사적 맥락을 새롭게 조명하며 베를린의 역사적 유산과 조응하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라지는 커뮤니케이션 수단과는 달리 예술이 시공간을 초월해 지속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실험하며 조망한다. 아울러 작은 크기의 특정 틀 안에서 예술의 형식을 실험하며 제약이 촉진시키는 예술적 표현의 확장 및 서사의 힘을 탐구한다.
더불어 이번 전시는 단순히 ‘한국성’을 강조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예술의 틀과 체계에 대한 실험적 기획을 통해 해외에서 한국 작가들의 작업이 소개되는 방식을 탐색한다. 이처럼 한국 미술이 국적이나 정체성을 넘어 다양한 맥락에서 국제적으로 재조명될 수 있음을 제안하며 앞으로도 이러한 실험적 시도가 지속되기를 기대한다.
변현주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