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까지 미국과 유럽의 주요 국가 중 고소득자에게 높은 세율을 부과한 나라는 없었다. 산업혁명으로 빈부 격차가 크게 벌어졌고, 민주주의 발전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보다 더 많은 표를 행사하게 됐지만, ‘부자에게 누진적으로 소득세를 더 매기자’는 논의는 힘을 얻지 못했다. 세수는 대부분 소비세와 관세, 정액세(소득과 관계없이 같은 액수로 걷는 세금)로 거둬들였다. 고소득자에게 많은 세금을 거두기 시작한 것은 1·2차 세계대전 발생 이후다. 1913년 7%였던 미국의 최고 소득세율은 1차 세계대전 참전 1년 후인 1918년 77%가 됐다. 영국은 1908년 6%였던 최고 소득세율이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97.5%까지 치솟았다.
미국 정치경제학자 케네스 스키브 예일대 교수와 데이비드 스타새비지 뉴욕대 교수는 2016년에 쓴 책 <부자 과세(Taxing the Rich)>에서 그 이유를 “대중을 동원한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공정성 서사’(narrative of fairness)가 힘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저소득층은 전선에서 싸우며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는데, 부자는 후방에서 전쟁 특수를 누리고 있다’는 서사는 고소득층에 급진적 누진 세율을 부과하는 명분으로 작용했다. 이런 ‘국가에 대한 의무’ ‘국민적 연대’ 서사는 전후에도 상당 기간 이어졌다.
소득세 최고세율이 급격히 하락한 것은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가 등장한 1980년대다. 단순히 우파가 정권을 잡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좌파 정권이던 스웨덴과 프랑스에서도 감세가 이뤄졌다. 시장 중심의 새로운 공정성 서사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희생이 보상받아야 한다’는 프레임은 ‘노력한 만큼 보상받아야 한다’로, ‘부유층은 특권층’이라는 인식은 ‘부유층은 혁신의 주체’로 바뀌었다. 자본의 이동성이 늘어난 것도 감세 경쟁에 불을 붙였다. 이런 서사는 대부분 국가에서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정부가 내년부터 기업들이 내는 법인세율을 1%포인트씩 인상한다고 한다. 전 세계가 법인세 인하 경쟁을 벌이는데 우리만 역주행이다. 인상 자체보다 더 억지스러운 것은 정부가 내놓은 증세 이유다. ‘윤석열 정부에서 1%포인트나 세금을 깎아줬는데, 기업들이 투자를 늘려 경제가 성장하기는커녕 세수만 줄어들었다’는 논리다. 그러면서 법인세 인상을 ‘정상화’라고 이름 붙였다. “‘진짜 대한민국’ 대전환을 위해 어디선가 재원을 충당해야 한다”며 ‘응능부담의 원칙’도 내세웠다. 기업인들은 이를 ‘복지비용 증가와 이재명 정부의 국정과제 실현을 위해 돈(재원)은 필요한데 가장 쉽게 세금을 걷을 수 있는 대상이 결국 말 못하는 기업이라는 얘기 아니냐’고 해석한다.
세금 제도는 국민 다수가 납득할 수 있는 윤리적 서사 위에 세워진다. 국민은 성장을 기치로 내건 이재명 정부를 선택했다. 이 대통령은 기업이 성장을 주도하고 국가가 뒷받침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만 있는 법인세 누진 세제는 성장하는 기업을 벌주는 제도다. 세율 인상은 처벌 수위를 더 높이겠다는 뜻이다. 법인세 인상은 증시 활성화에도 역행한다. 결국 주가 상승을 이끄는 것은 주당순이익 증가다. 게다가 법인세 인상은 언제나 사람에게 전가된다. 소비자와 직원, 특히 주주가 그 비용을 떠안는다.
1·2차 세계대전 당시 부자에게 고율의 세금을 부과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부자여서가 아니라 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글로벌 전장에서 목숨 걸고 싸우고 있는 것은 기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