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미국과의 관세 협상 결과로 우리가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원자력 발전 투자가 포함돼 향후 한·미 원자력 협력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무척 궁금하다.
한국 원자력산업은 미국의 기술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1959년 미국에서 들여온 연구용 원자로가 시초였으며, 1970년대 고리 1호기를 포함한 초기 상용 원전은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기술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렇게 원전 종주국의 제자로 출발한 한국이 이제는 미국에 투자하고, 기술을 수출하는 입장이 됐다.
기술 자립의 출발점은 국산화였고, 이후 G7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우리 고유의 차세대 원전 개발에 착수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APR1400이다. 1400㎿급인 이 원자로는 국내는 물론이고 수출 시장에서도 경쟁력을 입증했다. 대표적인 성과가 2009년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 수출이다. 최근에는 유럽 시장에도 진출했다. 체코 두코바니 신규 원전 사업에서 한국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며 APR1000의 수출 가능성을 높였다. 원전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의 전환은 단순한 외화벌이 이상의 의미가 있다. 기술력, 신뢰도, 시공 능력까지 종합적으로 인정받았고, 국격을 인정받았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미국 웨스팅하우스는 우리 원전에 자사의 원천기술이 포함됐다며 지식재산권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한·미 원전 협력은 한동안 법정 공방으로 얼어붙었다. 그러나 올해 초 양측은 법적 분쟁을 종결하고 미래 사업에서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기술 독립 선언’ 뒤에 ‘파트너십 복원’이라는 극한 갈등과 봉합 과정을 거쳤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최근 이뤄진 한·미 간 통상 협상은 흥미로운 전환점이 되고 있다. 대미 투자액 중 약 2000억달러가 원자력, 배터리, 반도체, 바이오 분야에 할당됐다. 100억달러만 해도 웨스팅하우스 규모의 기업을 통째로 인수해버릴 수도 있는 액수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그런 큰돈을 미국에 투자하는 것이 과연 이익인가? 돈을 퍼주는 악수 아닌가?” 그러나 다른 시각도 있다. 이 투자는 단순한 금전적 출혈이 아니라 기술 공유와 사업 권리를 확보하고,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키우는 ‘미래를 위한 기초작업’일 수 있다. 때로는 ‘돈이 돈을 낳게 하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 씨앗을 심듯 전략적 자본을 투입해야 할 때가 있다. 좋은 토지에 심은 씨앗은 결국 열매로 돌아오는 법이다.
특히 한·미 원자력산업 협력으로 한국과 미국 원자력산업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미국의 원자력 인허가 체계를 다시 자세히 접할 기회가 생긴다는 것은 큰 장점이다. 미국은 원전의 계속운전 허가에 가장 진보적인 국가로 평가된다. 설계 수명이 40년인 원전도 20년 단위로 연장해 현재 80년까지 허가받고 있다. 반면 한국은 40년 수명을 기준으로 하고 있으며, 10년 연장을 둘러싸고도 수많은 논란과 장애물이 존재한다. 이는 제도의 경직성, 정치적 갈등 그리고 과학적 판단 부족 등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신규 원자로, 소형모듈원전(SMR), 4세대 원전 기술 등 미래 원전산업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인허가 체계의 현대화가 필수적이다.
지금 우리의 원전 인허가 제도는 미국 1980년대 모델에 유럽식 규제를 덧붙이고, 일본식 관행을 참고해 만든 기묘한 하이브리드 형태다. 복잡하고 불명확하며, 시장의 흐름보다 규제의 관성에 더 치우친 구조다. 이런 제도로는 빠르게 움직이는 글로벌 원전 시장에서 생존하기 어렵다. 우리가 미국 원전을 들여오면서 인허가 제도도 복사됐듯이, 미국 원자력에 투자하면서 우리와 미국의 원자력산업이 자본으로 통합되는 이점을 활용해 새로운 규제를 빠르게 도입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제자의 위치에서 경쟁자, 동반자, 나아가 투자자로 변화하는 기로에 서 있다. 기술을 수입하던 나라가 이제는 기술을 제공하고, 자본을 투자하며, 제도를 고민하는 위치에 올라선 것이다. 이 흐름을 타고 글로벌 표준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혼자일 때보다 큰 시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