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 진보초 책방 ‘책거리’에서 열린 낭독회의 기억이 고스란히 나를 따라왔다. 낭독회 사회를 본 김현 시인의 말 때문인 것 같았다. “제가 낭독회에서 가장 좋아하는 소리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낭독이 시작되기 전의 정적. 두 번째는 낭독 중 들리는 종이 넘기는 소리입니다. 그리고 오늘 하나의 소리가 추가됐는데요. 서로 다른 두 언어가 섞이는 소리입니다. 그 소리들이 우리를 떠나 관객들을 따라갔으면 좋겠습니다.” 내 속에서 웅웅대던 마음을 친구가 대신 뱉어낸 것 같았다. 공감이 번지는 순간이었다.
광주 아시아문학페스티벌에서 친구가 된 일본의 소설가 호시노 도모유키는 이날 관객으로 와서 우리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쓴 세 편의 시를 읽었다. 제일 먼저 읽은 ‘방문객’이란 시의 문장들이 떠올라 빙그레 웃었다. “한국어로 시를 쓰는 사람들이 만든 동그라미 끝자리에/ 어렴풋이 미소를 지으면서 시를 읽고서/ 흡족한 얼굴로/ 그것은 더 이상 호시노 도모유키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호시노 도모유키였습니다.” 소설가 호시노 도모유키의 시인 데뷔 무대는 성공적이었다. 누군가 그의 시가 좋다고 말하면 고마웠고 흐뭇했다. 어느새 그는 내 마음을 나눠 쓰는 사람이 돼 있었다.
전날, 가쿠라자카 골목의 스시집에서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말의 힘이란 대단한 거여서 농담이 진담이 되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나는 한국말을 못하지만 이소연의 언어는 알아들어.”
사실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해 호시노 도모유키는 일본어와 한국어와 영어를 썼다. 나는 그의 말을 곧바로 이해하고 답했다.
“나는 일본어는 못하지만 호시노 도모유키의 언어는 알겠어!”
그도 내 말을 이해했고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폭소를 터뜨렸다. 영혼이 통하는 사이가 아니라면 이렇게 대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소울 메이트야. 그렇지?”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목젖이 보이도록 웃었다.
도쿄, 마지막 날에는 지하철을 잘못 타는 바람에 김현 시인이 가자던 책방에 가지 못했다. 운 좋게 발견한 와규집에서 김현 시인과 마지막 만찬을 하고 나섰더니, 주변 상점이 하나둘 문을 닫고 있었다. 구경도 제대로 못하고 돌아가는데 우연히 ‘약’이라고 적힌 간판을 발견했다. 일본에서만 파는 칫솔과 두통약을 사 오라는 친구들의 부탁 때문에 내내 숙제를 덜 한 기분이었는데, 두통약도 사고 칫솔도 샀다.
그런데도 미안한 마음에 지하철을 향해 걸으며 나도 모르게 푸념했다. “지하철만 제대로 탔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야, 저녁도 맛있었고 무엇보다 소연이 받은 미션을 다 해결했잖아. 두통약도 사고 칫솔도 사고.”
친구가 내 마음을 읽어 내는 순간 나도 비로소 친구의 마음을 읽어낸다. 나의 마음이 너의 마음이 되는 순간은 반짝인다. 그 반짝임으로 인해, 낯선 거리를 헤매는 일이 두렵기보다는 설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낭독회에서 통역을 맡아 준 호토리 사요의 메일을 받았다. “제가 지금 굉장히 힘든 시기여서, 시인님의 시를 만나고 읽은 그 순간만이라도 그 시가 분명 저를 구해줬어요.” 낭독회 때 읽은 ‘사슴뿔 자르기’에 대한 얘기였다. 힘든 시기에 쓰라린 마음을 안고 쓴 시가 누군가를 구할 수도 있다는 건 또 얼마나 큰 감동인가. 호토리 사요는 오사카 사람이라고 했다. 나라 사슴 공원에 자주 갔다고. “상처 입지 않기 위해/ 서로의 가장 빛나는 뿔을 잘라내야 한다면/ 아프지 않을 수 있나요?” 나를 살게 하는 일이 누군가를 아프게 하지 않기를 바라는 날들이 나와 그녀 사이를 잇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