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정권을 잡아도 나랏돈 들어갈 일은 더 많아질 것이다. 건강보험 지출 40%가 65세 이상에게 집중되기 시작됐다. 장기요양보험 지출은 5년 만에 9조 원대에서 18조 원을 넘기며 2배로 늘었다. 국민연금은 ‘더 내고 더 받는’ 개혁을 반영해도 2048년부터 적자다.
누가 대통령 돼도 나랏돈 더 쓸 일만
복지 강화는 이념 문제가 아니다. 삶의 문제다. 보수 진보 정권을 막론하고 건강보험, 국민연금, 기초연금, 무상보육, 장기요양보험 등 다양한 복지 제도가 새로 만들어졌거나 확대됐다. 한국 정치 역사는 복지 정책 강화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그러나 복지 확대에는 늘 따라붙는 질문이 있다. 그 돈은 어디서 나오는가다. ‘증세 없는 복지’ 논란이 본격적으로 불거진 게 2012년 대통령 선거 때다.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한국 복지의 허약한 기반을 상징하는 키워드다. 당시 대선에서 맞붙어 결과적으로 시차를 두고 대권을 거머쥔 박근혜 전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 모두 재임 중 변변한 재원 대책 없는 복지 정책을 추진했다가 상대 당과 전문가에게 뭇매를 맞았다.
그때는 그래도 논쟁이라는 게 있었다. 지금은 숫자 앞에서 아예 입을 다문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아동수당을 18세 미만까지 확대하겠다고 했고,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는 경선 과정에서 65세 이상은 낮 시간 버스 무료 공약을 내세웠다. 누가, 얼마나, 어떻게 돈을 마련할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질문하는 사람도 찾기 힘들다. 아무리 계엄과 탄핵으로 갑작스럽게 치러지는 대선이라지만, 가장 기초적인 계산조차 없다.
과거에는 엉성하게라도 ‘재원은 이렇게 마련하겠다’라는 설명을 했다. 무상급식 논쟁 때는 지방교육재정교부금 조정을 통해 예산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이 명시됐다(끝없이 퍼줘도 남아도는 교육교부금의 근본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박근혜 정부 기초연금 도입 때는 국민연금 연계 여부를 두고 논의가 병행됐다. 지금처럼 탄핵 대선이었던 2017년 문재인과 안철수는 아동수당 재원 마련책을 두고 공방을 벌였다. 지금은 정치가 숫자를 버렸다. 국가채무는 1100조 원을 넘었고 건보, 연금 등 각종 복지 기금은 빠르게 고갈되고 있는데, 이런 얘기를 하면 흘러간 옛 유행가 취급을 당한다. 감세는 말하면서 증세나 보험료 인상은 외면한다. 정치권은 표를 구하면서 책임은 지지 않는다. 나랏돈 들어갈 일은 분명히 늘어나고 있는데, 누구도 현실을 정직하게 말하지 않는다. 무지라기보다는 기만이고, 침묵이라기보다는 위선이다.복지 약속에는 책임 따른다
선진국은 다르다. 스웨덴은 1990년대 재정위기를 겪은 이후, 누진 소득세를 강화하고, 부가가치세를 25%까지 인상했다. 복지를 유지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세금을 감당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2023년 기시다 후미오 당시 총리가 방위비 증액으로 재정이 빠듯한 상황에서 저소득층에 가구당 10만 엔(약 100만 원)을 나눠주겠다는 선심성 약속을 했다가 지지율이 하락해 이듬해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더 많이 주겠다고 말하려면, 어떻게 감당할지를 먼저 설명해야 한다. 복지 확대는 단순한 약속이 아니라 나라 구조 설계를 바꾸는 것이다. 시혜를 베푸는 게 아니라 책임을 지는 일이다.
이상훈 정책사회부장 sangh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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