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추억과 반추의 대상으로 과거를 찾는다. 미래는 희망과 가깝지만 늘 기대와 예상에 머물 뿐이다. 과거, 지나간 시간! 그 시절이 그립다는 건 무욕(無欲)과 허심(虛心)에 대한 동경 어름이리라. 음악도 그렇다. 때론 옛날 음악이 듣고프다. 고전⸱낭만주의 대세인 서양음악에서 옛 음악이란 바로크 음악을 뜻한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바로크(Baroque)는 17~18세기 유럽의 미술⸱건축⸱음악 등을 포괄하는 예술 양식을 뜻한다. 원래 포르투갈어로 '이지러진 진주'를 뜻하는 'Pérola Barroca'에서 유래된 것으로 초기에는 그저 덩치만 큰 건축 양식이라는 멸칭(蔑稱)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비하 의미가 사그라든 경우다.
바로크 시대를 주름잡은 인물 중 하나로 비발디를 빼놓을 수 없다.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1678~1741,伊). 베네치아 태생의 작곡가⸱바이올리니스트요 가톨릭 신부. 교회 음악감독이며 소녀합창단을 이끌었다. 미사를 자주 빼먹는 등 종교적 믿음하고는 거리가 있었고 음악에만 진심이었다. 협주곡⸱신포니아 등 기악이 다수지만 오페라 6편에 성악이 담긴 종교음악을 몇몇 남겼다. 모테트(Motet)가 대표적. 대개 라틴어로 된 성경 구절이나 기도문 같은 종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고, 간단한 기악 구성에 합창⸱중창⸱독창 등 여러 형태로 불린다.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Nulla in Mundo Pax Sincera)RV 630'는 가장 유명하다.
[Vivaldi: Nulla in mundo pax, RV 630: I. Nulla in mundo pax sincera]
"세상은 고통 없는 참 평화 없어라 / 순결하고 진실하고 다정하신 신께만 허락된 일 /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영혼은 만족을 누리나니 / 오직 희망은 순수한 사랑뿐이네 / 세상은 늘 우리를 속이고 상처를 주지 / 웃음 짓고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을 멀리해야 해 / 명랑함과 유쾌함을 무기 삼아 우리를 잠식하기 때문일세 / 뱀들은 언제나 꽃과 아름다움 안에 숨어 독을 품고 있네 / 사랑에 미친 자들이 꿀을 핥듯이 키스를 멈추지 않는 것처럼"
57세(1735)의 원숙미 넘치는 비발디가 바로크 음악의 진수(眞髓)를 남긴 셈. 천상에서 내려온 듯한 아름다운 멜로디에 천사같이 청아한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어우러진다. 두 대의 바이올린⸱비올라⸱통주저음을 사용하며 아리아-레치타티보(敍唱:노래하듯 말하기)-아리아,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1997년 국내 개봉한 영화 샤인(Shine)에 쓰이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호주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헬프갓(David Helfgott)의 격동적인 삶을 다룬 대중성과 예술성을 인정받은 영화. ‘악마의 콘체르토’라 불리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이 가장 많이 나오지만, 극 후반부와 크레딧을 장식하는 비발디의 이 모테트도 상당히 각인되었다.
[영화 '샤인'에 나오는 비발디의 모테트 -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
소프라노 엠마 커크비(Emma Kirkby, 1949~)가 33세 때인 1982년 녹음한 것을 전범(典範)으로 친다. 영국 케임브리지 출생. 그녀의 특이한 이력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원래 고대어 문학을 전공했고, 취미로 성악 교습을 따로 받았다. 중창단⸱합창단 등에서 노래하며 르네상스와 바로크 음악에 빠져들었다. 25세 때 정식 데뷔 후 크리스토퍼 호그우드( Christopher Hogwood,1941~2014,英)의 고음악 아카데미(Academy of Ancient Music)와 음반 녹음을 한 게 커리어의 시작.
당시만 해도 소프라노와 정격(正格) 음악(시대음악)과의 매칭은 매우 드문 사례여서 이목을 끌었다. 이후 탁월한 고음악 아티스트로 활약하며 런던 바로크(London Baroque)와 계몽시대 오케스트라(Orchestra of the Age of Enlightenment)로 협연 무대를 넓혀나간다. 300장이 넘는 CD⸱LP를 남겼으며 2007년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대영제국 최고 훈장과 함께 남성의 Sir에 해당하는 데임(Dame) 작위를 받았다. 2019년 70세까지 활동 후 공식무대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커크비의 수정같이 맑은 목소리는 최소화한 비브라토(떨림음)로 전개된다. 그녀의 자연스러운 낭송과 발음, 기민한 기교, 섬세한 언어 감각은 고음악⸱르네상스⸱바로크 음악을 빛내준다. 이 분야의 본보기로 굳게 자리한다.” 저명한 음악평론가 니컬러스 앤더슨의 말이다.
강성곤 음악 칼럼니스트•전 KBS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