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 못 피한 스트레스와 불면… 꿀잠 이끄는 ‘천왕보심단’[이상곤의 실록한의학]〈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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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권력은 인간 욕망의 정점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항상 선하게 살려 애쓰는 자는 선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 틈에서 반드시 파멸한다. 권력을 지키려는 군주는 선하지 않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썼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마키아벨리의 지적대로 ‘너무 선해서 너무 많은 것을 잃은’ 군주였다.

조선왕조실록 졸기(卒記)는 중종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인자하고 검소한 것은 천성이지만, 우유부단하게 아랫사람에게 이끌려 진성군을 죽여 형제간의 우애가, 신비를 내치고 박빈을 죽여 부부의 정이, 복성군과 당성위를 죽여 부자 간의 은의가, 많은 대신을 죽이고 주륙을 일삼아 군신의 은의가 사라졌으니 애석하도다.” 한마디로 선한 정치를 꿈꾸었으나, 결과적으로 부인, 형제, 자식, 신하 모두를 잃은 셈이다.

스트레스가 켜켜이 쌓였던 탓일까. 재위 39년 무렵 중종은 ‘심열(心熱)’ 증상으로 쓰러진다. 심열의 증상으로는 얼굴이 붉고, 가슴이 답답하고, 불안해 잠을 이루지 못하며, 헛소리를 하고 갈증을 호소하는 것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때 쓰인 처방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이 ‘천왕보심단(天王補心丹)’이다. 과도한 스트레스는 심장을 달아오르게 하고 혈액을 마르게 한다. 천왕보심단은 심장의 열을 가라앉히고 혈액을 보충해 마음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불안·초조·두근거림·불면·신경쇠약에 두루 쓰인다. 산후 우울증이나 집중력·기억력 저하에도 효험이 있다. 단, 소화력이 약하거나 잦은 설사 체질이라면 주의가 필요하다.

오늘날 이 처방은 다양한 이름으로 상용화돼 불면증과 불안증 치료제에 쓰인다. 환자들 사이에 특히 “잠에 좋다”는 입소문이 많다. 불면증은 흔히 ‘뇌의 불안’ 때문이다. 불안이 걱정으로, 걱정이 망상으로 이어져 잠을 방해한다. 단순히 잠들기 어려운 입면 장애만이 아니라, 잠들어도 금세 깨는 ‘수면 유지 장애’, 아침 일찍 눈을 뜨는 ‘조기 각성’까지 모두 불면증이다.

한의학은 호흡과 심장 박동, 혈액 순환을 유지하는 힘을 ‘원기(元氣)’라 부른다. 원기가 부족하면 수면이 이어지지 않고 새벽에 눈이 떠진다. 피로가 심할 때 잠이 더 오지 않거나, 원기가 떨어진 노인에게 이런 증상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50대 이후 불면증의 주된 원인은 스트레스지만, 커피·에너지음료 과다 섭취, 흡연 같은 생활 습관도 원인이 된다. 교감신경이 흥분해 심장 박출량과 소변량이 늘어나면서 숙면을 방해하는 것이다.

천왕보심단에는 열을 내려 머리를 식히는 황금·황련, 심장을 안정시키는 생지황, 숙면을 돕는 산조인 등이 들어 있다. 이름 그대로 ‘꿀잠’을 이끌어내는 조합이다. 필자는 불면증 환자에게 약물 못지않게 ‘몸 관찰 명상’을 권한다. 누워서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천천히 감각을 따라가는 명상법이다. 감각을 통제하려는 게 아니라 변화하는 감각을 느끼고 알아차리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테면 눈 주위에 마음을 두면 미세하게 움직이는 기운이 느껴진다. 그러면 목·어깨·손발로 마음을 옮겨 감각을 살핀다. 이런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근육이 풀리고 어느새 잠이 찾아온다.

권력의 무게가 중종을 쓰러뜨렸듯, 오늘의 우리도 스트레스와 불면으로 무너진다. 천왕보심단과 명상은 그 시대와 오늘을 이어주는 또 하나의 ‘보심(補心)’일지 모른다.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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