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거인을 만들어 온 이유
암각화 속 크기로 드러낸 지위
중국에서도 거인의 모습을 한 3000년 전의 신상이 쓰촨성 싼싱두이(三星堆) 유적에서 발견됐다. 이 유적에선 높이 2.6m의 청동신상이 발굴됐다. 청동상의 시선은 관람자의 눈높이보다 한참 위에 있어 마치 박물관 관람객을 압도하는 듯하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그런 비대칭적인 크기를 보면서도 크게 불편하거나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다. 신분이 높은 사람을 크게 생각하려는 문화적으로 학습된 시각문법이 장착돼 있기 때문이다.
이 거인의 문법은 선사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러시아 알타이의 추야강 강변에 있는 대표적인 암각화 유적 칼박타시에는 중심 제단 역할을 하는 커다란 바위에 버섯 모양 모자를 쓴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 그 한가운데 거인이 있고, 그 머리 위로 거대한 괴물의 형상이 있다. 족장이나 샤먼이 집단을 대표해 악한 기운을 막아내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다.비슷한 장면은 유라시아 암각화 곳곳에서 확인된다. 카자흐스탄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탐갈리 암각화에도 머리에서 빛이 뻗어 나오는 거대한 인물 아래 작은 사람들이 춤을 추며 축제를 벌이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렇듯 인간은 지난 수천 년간 높은 지위와 힘을 지닌 존재를 거인으로 표현해 왔다.
미지에 대한 공포가 만든 거인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 때 거인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중국 역사서 ‘한서’ 오행지에는 진시황 26년 서쪽 변경인 임조(臨洮)에 키가 5장(약 11.5m)이고 발이 6척(약 1.4m)인 이민족 복장의 거인 12명이 출현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민족의 출현은 사람들에게 공포의 요소였다. 천하를 통일한 해에 진시황은 천하의 병기를 거둬 녹이고, 그것으로 열두 거인의 형상을 본뜬 청동상을 주조해 수도 함양에 세웠다. 백성들의 불안을 잠재우려 했던 것이다.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거인왕
하지만 고고학적으로 이 정도 신장의 인골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인골 중 가장 장신은 17세기 조선시대 무관 남오성으로, 사망 당시 키는 190cm로 추정된다. 신라에서는 탑동에서 180cm에 가까운 장신 인골이 발견된 정도다. 인골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 관의 크기로 시신의 크기를 추정하는데, 그렇더라도 2m가 넘는 장신의 흔적은 없다.
해외에서 인골의 신장이 2m 이상인 사례는 있다. 1991년 이탈리아 로마 근교에서 발굴된 16∼20세 남성의 인골은 추정 신장이 202cm였다. 뇌하수체에 이상 흔적이 남아 있어 거인증을 앓다가 요절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실제 거인이 존재하긴 했지만 매우 드물었다. 애초에 9척과 11척이라는 기록은 실제 측정치가 아니라 ‘위대한 왕이나 장군은 크다’는 점을 부각하기 위한 관용적인 표현일 뿐이다.
한 번도 끊긴 적 없는 거인 서사현대에도 거인에 대한 경외심과 두려움은 다양한 형태로 반복된다. 필자 세대가 올려다본 거인은 ‘로보트 태권V’나 ‘마징가 Z’ 같은 로봇이었다. 가슴이나 머리에 조종석이 있고 그 안에 사람이 앉아 조종하는 식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도 인류가 높은 벽을 쌓고 그 안에 숨어 살며 벽 밖에는 거인이 있다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최근 개봉한 나홍진 감독의 영화 ‘호프’에서도 우주인은 휴전선 밖의 거대한 거인처럼 묘사된다.
거인은 실존하는 괴물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내는 존재다. 1651년 토머스 홉스의 고전 ‘리바이어던’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책의 명성에는 프랑스 예술가 아브라함 보스가 새긴 표제 판화가 한몫했는데, 왕관을 쓴 거인이 산 너머에서 도시를 굽어보는 모습이다. 이 거인은 오른손에는 칼, 왼손에는 주교의 지팡이를 쥐고 있어 거대한 권력을 상징한다.
리바이어던은 성경 욥기에 등장하는 괴물을 지칭하는 용어에서 유래했다. 하지만 홉스의 뜻은 정반대였다. 자연에 무방비로 노출된 사람들이 공포에서 벗어나려면 힘을 모아 거인과 같은 보호장치인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책 표지의 삽화에 표현된 왕관을 쓴 거인의 몸이 수백 명의 작은 사람으로 채워진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만들어 낸 ‘리바이어던’은 때로 공포스럽게 작동한다. 수십억 명이 쌓아 올린 데이터로 굴러가는 플랫폼과 알고리즘, 그리고 인공지능(AI)이 그렇다. 우리에게 편리를 주는 동시에 우리를 내려다보는 거대한 거인이 돼가고 있다. 거인은 우리가 힘을 모아 의지하는 방패가 될 수도 있고, 우리를 해치는 괴물이 될 수도 있다. 거인의 뼈는 3000년 동안 한 번도 발굴되지 않았지만, 거인의 이야기는 한 번도 끊긴 적이 없다. 지금 오랜 신화를 다시 꺼내 보는 이유는 거인을 만드는 것도, 다시 거두는 것도 결국 인간의 손임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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