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 지적·결혼 압박…채용절차법 11년 후에도 면접갑질 계속
압박 가장한 무례…SNS 폭로·입소문 빠른 MZ세대에겐 안 통해
올해 갓 대학교를 졸업한 A 씨는 최근 홍보·광고계 기업 면접에 지원했다. 야심 차게 지원한 첫 면접에서 그는 “이력서 사진은 하얗게 생겼는데 실물은 까맣다”, “담배 피우는 편이면 함께 그냥 피우면서 면접 진행하자” 등 직무와 무관한 말을 들었다. B사 대표는 면접 후 술자리를 제안하는 등 사적인 연락도 서슴지 않았다. 경험을 쌓고자 했던 도전은 불쾌한 기억으로 남았다.
지난해 한 교육기관 면접에 지원한 C 씨는 혼인 여부를 묻는 면접관에게 “미혼”이라고 답하자 별안간 “결혼하세요!”라는 호통과 함께 “보통 결혼 못 한 30대 미혼 여자들은 성격이 다 이상하더라”라는 막말을 들었다. 면접관의 무례함을 지적했지만 “뭐가 기분 나쁜지 모르겠다”는 말만 돌아왔다.
11일 뉴스1 취재를 종합하면 ‘채용 절차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채용절차법)’이 시행된 지 11년이 지났지만 2025년에도 ‘면접 갑질’은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취재진이 면접 갑질 사례를 모집하기 위해 올린 글에는 이틀도 채 지나지 않아 150건이 넘는 댓글과 메일 제보가 쇄도했다.
압박 면접 가장한 무시·외모 평가·사생활 침해제보 중 상세 사례 16개를 뽑아 집중적으로 분석한 결과 면접 갑질은 크게 4가지 유형으로 나타났다.
① “체대 나왔는데 잘할 수 있겠어?” 무시형
지난해 IT 계열 중소기업에 지원한 체육교육과 출신 D 씨는 컴퓨터 개발 프로그램을 수료한 뒤 지원한 면접에서 “체대 나와서 잘할 수 있겠냐”는 질문을 받았다. 컴퓨터 언어 등 관련 전문 지식을 계속해서 쌓고 있다고 답했지만 “다른 데 가서도 힘들겠는데요?”라는 훈계를 들었다.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체육계 풍토가 싫어 전공을 바꿨다는 D 씨는 “지식산업계에서 일종의 선민의식처럼 남을 함부로 대하는 것에 실망스러웠다”고 토로했다.승마 산업계 모 회사에 지원했던 E 씨는 면접 자리에서 “너희 아니어도 할 사람 충분히 많다. 그러니 안 할 거면 그냥 나가라”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구직자들에 따르면 기업들은 압박 면접을 빌미로 자존감을 깎아내리고 무안을 주는 질문을 던졌다. E 씨는 “경력자에게는 그러지 못하면서 사회초년생들은 그런 (부조리한) 상황에 놓였을 때 별말을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② “돌싱이에요?” 사생활 침해형
사생활 침해형의 가장 대표적 유형은 혼인 여부 확인이었다.
채용절차법 제4조는 “구직자 본인의 출신 지역·혼인 여부·재산에 대한 정보를 기초심사자료에 기재하도록 요구하거나 입증자료로 수집하여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뉴스1에 제보한 여성 구직자의 대부분은 면접에서 해당 질문을 필수관문처럼 통과해야 했다.올여름 의료 기자재 업체 조직관리팀에 지원한 F 씨(20대)는 “여성분이시다 보니 앞으로 결혼이나 자녀계획이 있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을, 인공지능(AI) 관련 기업에 지원한 G 씨(40대)는 미혼임을 밝히자 “돌싱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부모님과의 동거 여부, 부모님의 직업, 주량까지 캐묻는 경우도 있었다.
G 씨는 “업무 외 질문으로 너무 당황스러운 적이 많았다”며 “고용노동부에 문의했지만 문서화된 내용이 아니라 신고도 못 했다” “채용절차법 자체가 소용이 없는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면 차라리 면접비라도 지급해야 한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③ “화장을 특이하게 했네” 외모평가형
A 씨 사례와 같이 외모나 차림새에 대한 뜬금없는 지적을 받았다는 사례자들도 허다했다.
수입 패션 브랜드에 지원한 H 씨는 면접관이 “화장을 특이하게 하셨네요”라는 말을 들었다. 지원 회사를 밝히지 않은 정 모 씨는 “똑똑하게 생겼는데 왜 전문대를 나왔냐”는 질문에 눈물이 날 뻔했다고 고백했다.
나아가 성희롱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지역 언론사에 비서직 면접에 나선 I 씨는 정장 재킷을 벗어 보라는 지시와 함께 회사 임원에게 ‘일하게 되면 딱 붙는 슬랙스나 딱 붙는 치마를 입고 일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해당 임원은 “자신과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을 포함해 면접 후기를 제출하라고 요구하는가 하면 면접 합격 통보를 하기도 전에 I 씨를 사석 식사 자리에 부르는 등 정상적 인사 절차를 벗어난 행동을 반복했다.
④ “정규직 전환해준다면서요” 취업사기형
국내 대기업 업무용 항공기 의전 담당 부서에 취업한 J 씨는 지난해 면접 당시 ‘1+1로 2년 근무한 후 정직원으로 전환하는 조건’을 안내받았다. 하지만 약 1년 반이 지났을 무렵 회사는 말을 바꿨다.
J 씨와의 계약을 담당한 헤드헌터사는 “본사가 정직원 전환 가능한 포지션임을 안내했다”고 주장했지만 본사는 “헤드헌터는 본사와 관계가 없다”며 책임을 미뤘다. 그가 체결한 계약서에는 ‘계약직’ 표기가 명시되지 않았다.
‘압박’ 아닌 ‘무례’…“MZ는 참지 않는다”
평등한 사내 문화를 만들기 위해 서로 영어 이름에 ‘님’자까지 붙이는 시대에 면접갑질은 줄기는커녕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고용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2020~2023년 4년간 채용절차법 관련 신고로 점검 대상이 된 사업장은 총 5542개에 이른다. 이 가운데 1143곳은 채용절차법을 위반한 것으로 파악됐는데, 2020년 56건에 비하면 10배나 불어난 수치다. 위반 항목은 직무와 무관한 개인정보 요구를 금지한 4조 3항 위반이 59.6%로 가장 많았다.
전문가들은 현재 노동시장의 구조상 기업과 면접관이 구직자보다 교섭력이 더 커진 점을 문제 요인으로 짚었다.
이병훈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공급에 비해 수요가 제한적인 상황에서 노동력을 사려고 하는 이들이 갑의 위치가 돼 있다”며 “조직 내 꼰대 문화가 조직 안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바깥에 있는 지원자에게까지 드러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이 교수는 “과거에는 사람들이 그저 감내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바로바로 반응하고 문제 삼는 분위기가 됐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폭로 등을 통해 기업 명성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직장갑질119의 윤지영 대표는 “국제노동기구(ILO) 190호 협약에 따르면 구직자를 포함한 일터에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해 신체적·심리적·성적·경제적 해를 끼치는 행위와 관행은 금지돼 있다”며 “우리나라도 협약을 비준하고 구직자들도 직장 내 괴롭힘의 대상 피해자가 될 수 있도록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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