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황금이 피와 분노로 변하던 순간[영감 한 스푼]

9 hours ago 2

獨 현대미술가 안젤름 키퍼
아시아 최대 규모 개인전 ‘솔라리스’

안젤름 키퍼의 신작 ‘옥타비오 파스를 위하여’ 일부. 사진 교토=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안젤름 키퍼의 신작 ‘옥타비오 파스를 위하여’ 일부. 사진 교토=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스페인에 식민 지배를 당하던 16세기 남미 아마존의 열대 우림.

제국주의자들이 탐내는 금이 쏟아지던 이곳에서 식민 당국은 토착 부족을 강제 노역에 동원해 금광에서 무자비하게 부려먹었습니다.

광기에 가까울 정도로 금에 집착하며 마구잡이로 약탈해가는 기이한 광경에 원주민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들은 황금을 먹기라도 하는 것인가?”

그럼에도 아랑곳 않고 혹독한 착취를 가하는 침략자들에게 원주민들은 참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입니다.

그리고 반란을 일으켜 스페인 감독관들을 붙잡고 끔찍한 형벌을 가합니다. 그들의 입을 벌리고 그 안으로 펄펄 끓는 금을 부어 버린 것입니다.

16세기 유럽에서 남미에서 벌어진 일을 듣고 상상으로 그린 삽화. 에콰도르 부족들이 스페인 식민 지배자들의 입에 끓는 금을 부어넣고 있다.

16세기 유럽에서 남미에서 벌어진 일을 듣고 상상으로 그린 삽화. 에콰도르 부족들이 스페인 식민 지배자들의 입에 끓는 금을 부어넣고 있다.

아즈텍 사람들은 금을 ‘신의 똥’이라 부르며 신성하게 여겼는데요.

그들에게 금은 태양신이 땅에 빛과 에너지를 전해주고 남은 흔적이었고, 아름답고 귀한 금속이지만 그것은 축적의 대상이 아닌 신성한 의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금을 감독관의 입으로 부어버리는 장면은 의미심장합니다. 아즈텍 사람들에게 ‘신의 똥’이었던 황금이 탐욕 앞에서 피와 분노로 변하는 순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 교토 니조성에서 열린 안젤름 키퍼 개인전 ‘솔라리스’ 입구에서 볼 수 있는 작품 ‘Ra’. 교토=김민

일본 교토 니조성에서 열린 안젤름 키퍼 개인전 ‘솔라리스’ 입구에서 볼 수 있는 작품 ‘Ra’. 교토=김민

독일 출신 현대미술가 안젤름 키퍼가 에도 시대 쇼군의 궁전이자 가노파 화가들의 황금빛 병풍이 호화롭게 장식되어 있는 ‘니조성’에 ‘히로시마 원폭 참사’와 ‘신의 똥’인 황금, 곡식이 빼곡한 모래밭, 그리고 머리가 없는 강철 여신들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키퍼의 아시아 최대 규모 개인전 ‘솔라리스’ 현장을 소개합니다.

히로시마, 옥타비오 파스, 오로라


안젤름 키퍼의 ‘옥타비오 파스를 위하여’. 교토=김민

안젤름 키퍼의 ‘옥타비오 파스를 위하여’. 교토=김민

제가 이 전시를 소개하며 아즈텍의 황금과 약탈 이야기를 한 이유는 이곳에서 본 신작 ‘옥타비오 파스를 위하여’ 때문입니다.

폭 9.5m, 높이 3.5m 대작인 이 작품은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파스(1914~1998)를 소환하고 있습니다.

우선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는 돌과 숯덩이가 끝없이 펼쳐진 들판이 보였습니다. 자연광으로만 작품을 감상하도록 조성된 공간에서 그림 가운데 햇빛이 반사돼 번쩍이는 가죽 같은 것이 눈에 띄었는데요.

가까이 가서 보니 비명을 지르는 여자의 얼굴이 거꾸로 매달린 형상이었습니다.

안젤름 키퍼의 ‘옥타비오 파스를 위하여’. 그림 가운데 형상을 가까이서 본 모습. 측면에서 봐야 모양이 제대로 보입니다. 교토=김민

안젤름 키퍼의 ‘옥타비오 파스를 위하여’. 그림 가운데 형상을 가까이서 본 모습. 측면에서 봐야 모양이 제대로 보입니다. 교토=김민

그림 속 인간은 고통받고 있지만 그 모습이 한 눈에 보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금박과 각종 금속을 산화해 만든 청록색 물감으로 뒤덮인 무심한 듯 아름다운 들판이 압도했죠.

불에 탄 것 같은 돌 위에는 물감이 아주 두껍게 발라져서, 요셉 보이스의 지방 덩어리가 놓인 의자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80주년을 계기로 삼고 있습니다.

즉 그림 속 폐허가 된 들판은 원자폭탄 폭격으로 황폐해진 지역의 모습에서 시작한 것이죠.

그러나 이 작품은 역사적 사건의 비극이나 고통에서 한 단면만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즉 고통스러운 폐허를 표현한 풍경이 역설적이게도 매혹적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금 장식이 가득한 에도시대 궁전, 원자폭탄으로 폐허가 된 땅. 여기에 키퍼는 남미인 멕시코 출신 시인 ‘옥타비오 파스’를 끄집어 냅니다.

이로 인해 이 전시에서 ‘금’은 빛과 어둠, 성스러움(신의 똥)과 탐욕(피의 분노), 파괴와 재생 등 복합적인 키워드를 떠오르게 하는 상징이 됩니다.

안젤름 키퍼의 ‘오로라’. 교토=김민

안젤름 키퍼의 ‘오로라’. 교토=김민

이 작품 옆으로 가면 원폭으로 뼈대만 남은 초등학교 사진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 ‘오로라’가 보입니다.

공동 묘지처럼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앙상한 건물 구조가 겹겹이 건조한 선으로 그려져 있는 그림입니다.

그 가운데 황금 판자가 담긴 유모차가 매달려 있고, 이 유모차를 중심으로 녹슨 청록색 물감이 마치 생명력을 전하듯 퍼져 나가는 형상입니다.

안젤름 키퍼의 ‘오로라’. 교토=김민

안젤름 키퍼의 ‘오로라’. 교토=김민

작품 제목 ‘오로라’는 1905년 러일전쟁 때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 해국의 포격으로 큰 피해를 입은 러시아 군함을 일컫습니다.

오로라 군함 피격 사건은 러시아 혁명을 일으키는 신호탄이자, 일본의 제국주의가 팽창하는 계기가 됩니다. 한 가지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동아시아의 역사적 지형을 흔드는 모습을 상상해보게 만드는 제목입니다.

자신을 ‘역사를 먹고 사는 기생충’이라고 표현한 적도 있는 키퍼는 되풀이되는 역사 속 사건들에 인간의 복잡한 속성, 그것을 이해하며 생겨나는 희망을 신화와 문학 같은 이야기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안젤름이 여기 있었다


안젤름 키퍼 개인전 ‘솔라리스’ 전시 전경. 교토=김민

안젤름 키퍼 개인전 ‘솔라리스’ 전시 전경. 교토=김민

키퍼의 개인전은 평소 공개되지 않는 공간인 니조성의 대형 부엌과 조리실을 활용해서 열렸는데요. 쇼군이 머물던 화려한 궁전 ‘니노마루고텐’과 달리 이곳은 어둡고 무거운 목조 건축물이었습니다.

전시는 가장 큰 공간에 대형 신작을 늘어 놓고 나머지 공간엔 각각 ‘모건소 플랜’을 모티프로 한 작품들과 키퍼의 고향에 있는 ‘라인강’에서 출발한 작품들을 선보였습니다.

‘모건소 플랜’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군수 산업과 중공업을 제거하고 농업과 목축 중심의 국가로 만들자는 계획을 말합니다. 즉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사건 그 이후 무렵 같은 패전국이자 키퍼의 출신국인 독일의 역사를 모티프로 한 작품입니다.

안젤름 키퍼의 ‘모건소 플랜’. 교토=김민

안젤름 키퍼의 ‘모건소 플랜’. 교토=김민

작품은 목조 건물 내부에 모래를 깔고 곡식을 빼곡히 설치해 들판처럼 만들었고, 곡식의 머리 부분 곳곳에는 금이 칠해져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모건소 플랜은 실제로 이뤄지진 않았는데, 만약 정말로 실현됐다면 독일 땅은 이런 광경을 하게 되었을까? 곡식들 사이로 자세히 살펴보면 납으로 만든 커다란 책과 뱀 조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안젤름 키퍼의 ‘모건소 플랜’ 속에 숨겨진 황금빛 뱀. 교토=김민

안젤름 키퍼의 ‘모건소 플랜’ 속에 숨겨진 황금빛 뱀. 교토=김민

개인적으로는 무언가를 억지로 제압하거나 거스르려는 인간의 행동을 돌아보게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게 꼭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고요. 지금까지 그런 행동이 문명을 만드는 데 일조했지만, 때로는 스스로를 파괴하는 덫이 될 수 있다는 이중적인 이야기로 다가왔습니다.

안젤름 키퍼의 ‘안젤름이 여기 있었다’. 교토=김민

안젤름 키퍼의 ‘안젤름이 여기 있었다’. 교토=김민

그리고 미술사의 유명한 작품 ‘아르놀피니 부부’ 속에 화가가 ‘얀 반 에이크가 여기 있었다’고 남긴 글귀를 차용한 연작 ‘안젤름이 여기 있었다’도 인상 깊었습니다.

키퍼는 역사에 대해 ‘승자가 쓴 것이든 누가 쓴 것이든 하나의 이야기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보면서, 자기는 역사를 자기 방식대로 소화하고 주물러서 작품으로 만들고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안젤름 키퍼 ‘솔라리스’ 전시 전경‘. 교토=김민

안젤름 키퍼 ‘솔라리스’ 전시 전경‘. 교토=김민

현실에서도 한 가지 사건을 두고 100명의 사람이 100개의 다른 해석을 내놓는 걸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역사의 많은 사건들은 100개 중 하나만 맞다고 누군가 억지로 강요하거나 주장하며 생깁니다. 이를 통해 권력이 생기기도 하고, 때로는 그것이 선을 넘어 뒤틀린 사건을 만들죠.

이 ‘뒤틀림’이 제때 해결되지 않으면 원자폭탄 폭격, 전쟁 같은 커다란 비극이 생겨나고 모든 것이 파괴된 뒤,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인류가 살아온 세상이 아닐까 돌아보게 하는 작품입니다.

그런 가운데 키퍼는 풍경과 한 몸이 된 듯 윤곽선만 간신히 딴 자신을 뒷모습으로 그려 넣으며. 세상을 보는 주인은 내 밖의 이데올로기도 권력도 무엇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고, ‘내가 그 모든 걸 보았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안젤름이 여기 있었다. 교토=김민

안젤름이 여기 있었다. 교토=김민

안젤름 키퍼: 솔라리스 (Anselm Kiefer: Solaris)
- 2025년 3월 31일 ~ 6월 22일
- 일본 교토 니조성 (Nijo Castle, Kyoto)

※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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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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