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칸영화제에선 전 세계 영화 아카데미 학생들의 작품 수천 편이 응모되는 부문이 있다. 학생 중단편 경쟁 부문인 ‘라 시네프’다.
올해 이 부문에는 전 세계에서 2679편 작품이 출품됐는데, 라 시네프의 올해 ‘1등상’을 한국영화아카데미 허가영 감독의 단편영화 ‘첫여름’이 차지했다.
23일(현지시각) 칸 현지에서 이뤄진 인터뷰에서 허 감독은 “제겐 너무 각별한 작품이고, 모두가 정말 진심을 다시 힘들게 찍었는데, 칸영화제에서 결실까지 가져가게 돼 너무 감사하다”며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이 고맙고 너무 큰 영광”이라고 운을 뗐다.
인터뷰 전날인 22일 정오께 칸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팔레 드 페스티벌 5층 뷔뉴엘 극장에서 관람한 허 감독의 ‘첫여름’은 노년 여성 영순의 행적을 뒤따르는 작품이다.
영순은 카바레에서 만난 연하 남성 학수에서 계속 전화를 걸지만 학수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신호음 대신 학수가 설정해둔 ‘뽕짝’만이 휴대전화에서 흘러 나온다. 영순은 학수 아들에게서 학수가 사망했으며, “아버지의 49재가 내일”이란 연락을 받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날은 손녀딸의 결혼식이다.
“외할머니에게 영감을 받은 작품이에요. 할머니는 생전에 통념에서 벗어난 분이셨는데, 한번은 할머니를 인터뷰하는 과제가 있어 이야기를 나눴다가 ‘할머니’라는 이름에 가려진 ‘개인’을 알게 됐어요. 여전히 춤을 추길 좋아하고,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인데 노년 여성들은 ‘할머니’라는 이름에 가려져 있잖아요. 노년 여성에 대한 관심은 할머니를 인터뷰한 뒤부터 생긴 것 같아요.”
영순은 원치 않는 성관계 등 가정폭력에 가까운 삶을 살아왔다. 또 극도로 혐오하는 남편의 병수발로 오래 지쳐 있다. 여전히 폭압적인 남편의 휠체어를 밀어야 한다. 학수는 달랐다. 학수는 영순을 따뜻하게 대했다. 그래서 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영순에게 학수와의 ‘마지막 인사’는 중요하다. 그는 영순에게 온기를 준 유일한 인물이다.
그런데 왜 제목이 ‘첫여름’이었을까.
“학수는 영순에게 ‘첫여름’을 준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둘의 관계보다도, 영순은 오랫동안 자기 인생에서 여름을 빼앗겼던 인물이에요. 저는 영순에게 ‘빼앗긴 여름’을 되돌려주고 싶었습니다.”
대단히 인상적인 장면이 영화 말미에 나온다. 영순이 추는 춤이다. 스포일러이기에 자세히 공개할 순 없지만 영순은 애도의 춤을 춘다.
허 감독은 “그 장면에 공감해주시는 분이 정말 많았다”고 설명했다.
“영순의 춤은 학수를 위한 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여름을 빼앗겼던’ 자기 자신에 대한 애도의 춤이기도 해요. 사실 이 신을 위해, 이 장면을 넣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자신의 삶을 위한 춤이자 스스로를 향한 연민, 그리고 해방을 담은 춤이기도 해요.”
이날 뷔뉴엘 극장 상영 직후, 현장에선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전 세계 영화인들이 허 감독에게 찾아오는 백발의 외국인 여성들 모습도 보였다.
“유럽의 할머니들의 ‘첫여름’을 보고 정말 큰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었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남미에서 오신 할머니도 떠오르고요. 저로선 정말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어요. 영화의 힘이 이렇게 크구나, 이야기의 보편적인 힘이 이렇게 강하다는 것을 새삼 다시 깨달았습니다.”
올해 칸의 주인공으로 떠올랐지만, 이 영화에 영감을 준 외할머니(고 이영희 분, 2023년 작고)는 이제 세상에 없다. 엔딩 크레딧에는 허 감독의 외할머니에 대한 마음이 담겼다. “살아계셨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생각하게 된다”는 허 감독은 상영 당시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고도 털어놨다. 허 감독은 맨 앞좌석 우측에 착석했었다.
“영화가 상영될 때 맨 앞 좌석에 앉았는데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됐어요. 라 시네프 수상도 기쁘지만 세계의 관객들을 만난 것이 제게는 더 기뻐요. 한국적 이야기로 전 세계 사람에게 가닿는 순간이 꿈만 같습니다. 저는 정상성에서 벗어난 이야기에 관심이 큰데,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더 만들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