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 콩쿠르의 분기점이 된 폴리니의 우승
지난 5월 쇼팽의 고향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대회 중 하나인 '제19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예선이 치러졌다. 5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이 콩쿠르는 신진 피아니스트들이 세계적인 무대로 발돋움할 수 있는 최고의 등용문 중 하나다. 2015년에는 조성진이 우승했고, 올해는 이혁-이효 형제를 포함해 4명의 한국인 피아니스트가 10월 2일부터 23일까지 열리는 본선 무대에 진출해, 총 85명의 피아니스트와 치열한 경합을 벌일 예정이다.
이탈리아 출신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마우리치오 폴리니(Maurizio Pollini, 1942~2024)는 1960년 2월 22일부터 3월 13일까지 열린 '제5회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다. 당시 심사위원장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Artur Rubinstein)은 “(기교면에서) 여기 앉은 심사위원보다도 뛰어나다”며 그에게 찬사를 보냈다. 당시 폴리니의 나이는 28살이었다.
이전 쇼팽 콩쿠르에서는 소련과 폴란드 출신 피아니스트가 우승을 모두 휩쓸어 갔는데, 폴리니의 수상을 기점으로 다양한 국적의 서구권 우승자를 비롯해 동양권 피아니스트까지 입상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즉, 폴리니 등장 전후로 쇼팽을 둘러싼 많은 것이 바뀌게 된 것이다.
낭만주의 피아니즘의 과도기적 음반
폴리니의 <쇼팽 에튀드>
폴리니는 콩쿠르 입상 직후 EMI와 전속 계약을 맺고 두 장의 쇼팽 앨범을 녹음하는데, 하나는 파울 클레츠키(Paul Kletzki)와 연주한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이었고, 다른 하나가 바로 이 앨범 <쇼팽 에튀드 Op. 10&25>였다. 1960년 9월에 녹음된 이 앨범은 폴리니의 대표적인 레퍼토리임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유는 그가 오랜 시간 동안 발매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폴리니의 쇼팽 에튀드는 경쟁사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발매한 1972년 뮌헨 레코딩 버전이 인지도가 높다). 한동안 앨범 발매를 거절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던 폴리니는 2011년에 발매를 허락했고, 마침내 테스타멘트 레이블을 통해 빛을 보게 되었다. 폴리니가 생전에 처음으로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쇼팽 에튀드>인지라 연주자들에게 중요한 레퍼런스가 될 연주인데, 워너뮤직클래식이 리마스터링한 음원을 2장의 LP에 담아내었다.
<쇼팽 에튀드>는 피아니스트라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자 연습곡의 정수로, 쇼팽이 20대 초중반에 완성한 곡의 모음이다. 쇼팽은 <Op. 12>와 <Op. 25> 에튀드에 각각 12곡씩 작곡했고, 후에 작은 에튀드 3곡을 만들어 총 27개의 에튀드를 남겼다. 쇼팽이 <Op.10>을 친구 리스트(Franz Liszt)에게, <Op. 25>를 리스트의 연인 마리 다구(Marie d'Agoult)에게 헌정한 일화도 유명하다.
폴리니는 이 앨범에서 <Op. 10>, <Op. 25>를 연주했다. 28살의 청년의 쇼팽 콩쿠르 수상 직후라 기세등등함과 투박함이 연주 부분마다 느껴지지만, 매 곡마다 명확한 아티큘레이션을 들려주면서 <쇼팽 에튀드>가 추구하는 본질이 무엇인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 같다.
<Op. 10>는 <Op. 10-9>를 제외한 모든 곡들이 3부(A-B-A) 형식을 띠고 있는데, 폴리니는 단순 명료한 형식미에 기교와 전달에 촛점을 두고 연주한 것이 느껴진다. 특히 <Op. 10-4>이나 <Op. 10-8>에서 몰아치는 속도감은 청년의 활활 타오르는 에너지를 고스란히 전달한다. 66마디의 F음 하나를 제외하면 오른손의 모든 음이 검은 건반 만을 연주해야 하는 <Op. 10-5(흑건)>에서는 그의 기교적 완전무결함이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으며, 화음과 주선율이 치열하게 충돌하는 <Op.10-12(혁명)>에서는 주선율이 확실하게 들리도록 성부 간의 균형을 만들어 간다.
<Op. 25>는 <Op. 12>에 비해 여유롭게 연주한 것이 느껴진다. 특히, 속도의 완급조절을 통해 여운의 소리까지 품어야 하는 <Op. 25-2>와 <Op. 25-6>는 폴리니가 1972년 뮌헨에서 녹음했던 수준의 경지와 거의 맞먹을 정도로 멋진 프레이징을 구사한다. <Op. 25-11>과 <Op. 25-12>에서 들려주는 현란한 연주에 귀 기울인다면, 30대 폴리니의 연주와 어떻게 달라졌는지 비교해 볼 수 있다.
시대마다 쇼팽 에튀드를 연주하는 법도 연주자마다 다르고, 레코딩 기술과 청자의 감상 기준도 시대에 따라 변한다. 때문에 현재 이 앨범을 처음 듣는다면, 다소 투박하고 너무 솔직하게 표현해 당황스러운 부분도 있을 것이다. 쇼팽 콩쿠르에서 수상한 청년에게 메이저 음반사 계약과 함께 <쇼팽 에튀드>를 스튜디오에서 녹음하라고 했으니, 얼마나 벅찬 감정이었을지 상상도 해본다. 하지만 이런 투박한 부분조차도 쇼팽의 광기 어린 사랑과 예술혼의 연장선이라고 본다면 다시 이 음반을 찾게 된다.
낭만주의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이 낭만주의적 피아니즘을 완벽하게 복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분명 시대 별로 다양한 해석과 시도가 있었기에, 조성진과 임윤찬이 연주하는 쇼팽에서 다른 차원의 낭만주의 피아니즘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낭만주의 피아니즘의 과도기에 있는 폴리니의 <쇼팽 에튀드, Op. 10&25> 앨범은, 해당 곡 연주의 좋은 참고 자료가 될 것이다. 대부분의 클래식 애호가는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등장 전후로 쇼팽을 대하는 태도와 연주법이 변화했다고 말한다. 이를 염두해두고 기회가 된다면, 폴리니의 다른 레코딩과 이 앨범을 비교해 들어보길 권한다.
이진섭 칼럼니스트•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