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 사는 다국적 예술가들의 ‘아메리칸 드림’은 유효한가. 그 질문에 ‘Yes’라고 답할 만한 사람이 여기 있다. 목탄과 잉크를 쥔 브루클린의 한인 화가 애나 박이다. 그가 만드는 흑백의 대형 회화들은 깊고 웅장한 동양의 수묵과 미국 팝아트의 경계를 넘나든다. 지난 3월, 글로벌 대형 갤러리 리만 머핀의 최연소 전속 작가가 된 그를 사직동 리안갤러리 서울에서 만났다.
미국 싱어송라이터 빌리 아일리시는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애나 박(29)의 그림을 2021년 앨범 커버로 썼다.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를 포함한 할리우드 유명 인사, 팝아트의 거장 카우스KAWS, 미술계의 눈 밝은 컬렉터들은 애나 박이 아직 대학생이던 시절부터 그가 그린 그림들을 ‘잉크가 마르자마자’ 앞다퉈 사 갔다.
할리우드의 스타 감독 데이비드 핀처가 갑자기 전화를 건 일도 있다. “나의 넷플릭스 영화 <맹크Mank>(2020)의 포스터를 좀 제작해줄 수 있을까?” 장난 전화인 줄 알았던 작가는 핀처 감독임을 여러 번 확인한 후에야 작업에 돌입했다. 이쯤 되면 미국으로 이민 간 어느 금수저 집안의 딸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림깨나 그린다는 젊은이들이 전 세계에서 이주해 한 번쯤 ‘포스트 바스키아’나 ‘포스트 잭슨 폴록’을 꿈꾸는 뉴욕 아닌가. 든든한 후원가나 체계적인 프로모션, 자본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좀처럼 예술가로 살아남기 힘든 곳이 바로 뉴욕이다. 그런 그의 스토리는 대구에서 시작한다.
약사인 부모님 밑에서 2남매의 둘째로, 대구에서 태어난 애나 박은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 늘 거실 구석에서 조용히 무언가를 그리던 아이였다. 예쁜 인형이나 또래 아이들이 좋아하는 장난감을 사줘도 별 관심이 없고, 손에는 늘 크레용을 쥐고 있었다. 재활용 박스에서 버려진 종이, 약 봉투 등을 모아 이것저것 만들며 노는 게 전부였다고. 다섯 살 땐 초등학생까지 참여하는 한 미술 대회에서 대상을 받았지만, 정작 학교에 입학하고 나선 슬럼프에 빠졌다. 그리고 싶은 것이 아닌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그려야 하는 답답함이 가장 컸다. 교육열이 유난한 대구에선 아무리 그림을 잘 그려도 인정받지 못했다. 다른 부모들은 학교를 찾아가 ‘잘 부탁한다’는 의미의 인사를 수시로 하던 때였다. 애나 박의 어머니는 그때 결심했단다. “여기서는 애들 못 키우겠다. 미국으로 가자”고.
아홉 살이 되던 해,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애나 박의 가족은 몇 달 뒤 주 교육청에서 연락을 받았다. 서던 캘리포니아주 전체에서 애나의 그림이 대상을 받았다는 소식이었다. 어머니의 약사 취업이 솔트레이크 쪽으로 연결되면서 유타주로 떠난 애나 박은 그곳에서도 실력을 뽐냈다. 학교 수업의 일환으로 그린 캠페인 포스터가 미국 전체 주에서 1위를 해 워싱턴 D.C.에서 열리는 시상식에 초대받은 것이다.
“지인도 친척도 없는 미국에서 부모님은 월급으로 생활하며 성실하게 주택담보대출을 갚는 형편이었어요. 저는 그냥 그림이 좋아 계속 그렸을 뿐인데 자연스레 상이 따라오고 부상으로 컴퓨터도 받고(웃음), 여러 매체에서 인터뷰도 하면서 순식간에 그 지역에서 우리 가족이 유명해지긴 했죠.”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도 애나 박은 미국의 여러 미술 대회에서 수많은 상을 휩쓸었다. 교육청 로고, 각종 캠페인 포스터까지 10대 시절 애나 박의 활약은 그야말로 전국구였다. 꿈은 의심할 여지 없이 화가로 이어졌다. 달리 다른 길을 생각할 이유는 없었다. 대학에 갈 때 즈음, 애나 박은 홀로 뉴욕행을 택했다.
“기왕 화가의 길을 선택할 거라면,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승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수많은 아트 스쿨이 있고, 미술관과 갤러리는 물론 예술가들이 밀집한 중심지였으니까요. 진정한 전원생활이었던 유타주는 돌이켜보면 조금 단조롭고 지루했던 것 같아요. 뉴욕에 와서는 모든 것이 저에게 영감을 줬어요. 댄스 플로어에서 춤추는 사람들, 타임스스퀘어의 붐비는 광경 같은 것들요.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때는 그런 역동적인 모습을 끊임없이 그리곤 했죠. 전형적인 혼돈 속에서, 아수라장이 된 파티와 행사장. 행복한 사람들의 얼굴을 조금 괴상하고 우스꽝스럽게 표현했어요.”
뉴욕 프랫인스티튜트에 입학한 그는 1학년 전체의 파이널 평가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예술가로서 자립할 수 있을까 걱정하던 부모님도 비로소 안심했다고. 그는 유년기를 보낸 솔트레이크보다 월등히 비싼 물가와 열악한 주거 환경 탓에 미술관 기프트 숍, 베이커리 같은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작업에 몰두했다. 일러스트레이션을 전공하다가 한 교수의 권유로 드로잉으로 전공을 바꿨다. 하지만 느슨한 수업 방식이 그와 잘 맞지 않아 뉴욕 예술 아카데미)New York Academy of Art)로 학교를 옮기게 된다. 2019년, 그곳에서 열린 학생 단체전은 애나 박에게 작가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엄청 조용한 아저씨가 와서 그림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더라고요. 누군지 모르고 열심히 설명했는데, 그냥 웃고 나가더라고요. 나중에 복도에서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보고 환호하는 걸 보고 누군지 알았죠. 최고의 팝 아티스트인 카우스KAWS였어요.”
카우스가 인스타그램에 애나 박의 그림을 SNS에 공유하면서 다음 날부터 학교에 전화가 빗발쳤다. 그림을 사고 싶다는 문의였다. 친구 4명과 함께 살던 방에 쌓여 있던 그림, 스튜디오에 있던 그림들은 금세 다 팔렸다. 그렇게 하룻밤 사이 뉴욕 미술계의 ‘라이징 스타’가 됐지만, 애나 박은 안주하지 않았다. 목탄과 잉크로 그린 그의 대형 드로잉은 점차 추상과 구상의 영역을 넘나들며 현대인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는 주제로 확장됐다.
왜 하필 목탄이었을까. 어린 시절 드로잉을 즐기던 그에게 목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매체다. 순간적으로 기억을 남기듯 빠르게 스며드는 목탄의 음영에 매료된 그는 주재료로 목탄을 지금껏 자신의 ‘시그니처 재료’로 삼았다.
애나 박이 다루는 주제는 다채롭다. SNS 홍수 속에서 현대인의 정체성, 미디어와 권력에 대한 문화적 인식,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회의 이중성 등을 탐구한다. 현대사회의 단면들을 광고나 영화 속 장면을 차용해 풍자하는 재주도 탁월하다.
그의 작품은 얼핏 단순한 색채처럼 보이지만 유화처럼 강렬한 카리스마를 지닌다. 이미지는 여러 개가 중첩된다. 텍스트를 삽입하는가 하면 잘 아는 브랜드의 로고가 박히기도 한다. 초기 작품은 주로 인물화, 군상 등이 등장해 흑백의 극명한 대비가 두드러지지만, 그 안엔 사실적 묘사가 살아 있다. 목탄 특유의 뭉개지는 효과와 속도감이 조화를 이루며 캔버스 위엔 역동적 에너지가 넘친다. 오로지 흑백의 스펙트럼 안에서 그가 그려내는 인물들- 특히 데미 무어 주연의 아카데미상 수상작 <서브스턴스>에서 착안한 시리즈-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뒤틀리고 뒤엉킨 인물 표현과 응축된 불안과 공포를 폭파시키듯 쏟아낸다.
그의 그림은 비교적 늦게 한국에 도착했다. 뉴욕과 도쿄 등 갤러리 전시를 포함해 미국, 호주 미술관 개인전을 연 그는 가족 모두의 고향이기도 한 대구, 그곳을 대표하는 화랑인 리안갤러리에서 <Good Girl>이라는 이름으로 올해 신작 14점을 선보이고 있다.
이번 전시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져온 여성성의 정의와 역할에 대한 주제를 다룬다. 결혼식 초대장을 의미하는 ‘Save The Date’ 등 은유적 이미지들을 발췌하는 것으로 시작해 여성 스스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다고.
“SNS에서 여성들이 공유하는 이미지를 보고 있으면, 어쩌면 과거보다 더 과거로 여성의 역할이 회귀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 지점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전시는 6월 28일까지, 내년엔 리만 머핀 런던에서 개인전이 예정돼 있다.
김보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