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로 죽는 건 수치” 생전 재산 90% 환원… 냉혹한 철강왕의 변신[이준만의 세상을 바꾼 기업가들]

3 weeks ago 6

이준만 서울대 경영대 교수

이준만 서울대 경영대 교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Make America Great Again)’운동 중에 한 가지 부각되는 사실은 미국의 제조업을 다시 살리자는 내용이다.

미국 밖에서 제조되는 물건에 관세를 심하게 붙이면, 제조업체들이 미국에 공장을 들여올 것이라는 예측을 기반으로 한다. 궁극적으로는 이를 통해서 ‘러스트 벨트’라고 불리는 미 제조업 중심 지역들의 경제를 다시 풍족하게 만들려고 하는 노력이다.

이러한 움직임이 과연 성공할지에 대해 경제·경영학자들은 부정적이다.

그렇긴 해도 이 추억 되살리기 운동 덕분에 미국에 제조업 전성기를 가져다준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 같은 사람이 많이 회자되는 풍경은 재밌다.》

카네기는 철강산업에서 획기적인 혁신을 이루며 미국을 세계 최고의 산업 강국으로 끌어올린 인물이다. 그의 성공은 단순히 운이나 시대의 흐름 때문이 아니다. 철저한 사업 전략과 지속적인 혁신, 그리고 때로는 냉정하고 무자비한 경쟁의 결과였다.

피도 눈물도 없던 냉혹한 사업가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카네기는 가난한 가정 형편으로 인해 1848년 13세의 나이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 직물공장의 어린 노동자로 시작한 그는 곧 전신회사의 전보 배달원으로 취직해 뛰어난 업무 능력과 성실함을 인정받았다. 이후 철도회사에서 근무하며 산업과 사업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키우고, 마침내 자신의 사업을 시작할 자본과 경험을 축적하게 됐다. 카네기는 철강산업에 당시 혁신적인 ‘베서머 공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생산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고 생산량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 이를 통해 당시 급성장하던 미 전역의 철도망과 고층빌딩 건설에 필요한 철강 수요를 충족시키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카네기는 성공 과정에서 경쟁자들을 가차 없이 몰아붙이는 등 사업에선 피도 눈물도 없는 면모를 보였다. 대표적으로 그는 경쟁사의 상황을 철저히 조사한 후 주문을 가로채기 위해 자신의 회사 제품을 고의로 매우 낮은 가격으로 공급해 경쟁사를 붕괴시킨 일로 유명하다. 그는 이 같은 저가 경쟁을 통해 경쟁 기업들을 몰락시키고, 시장에서 독점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미국 전체 철강 생산량의 대부분을 장악하게 됐다.

독점적 지위 덕분에 카네기는 시장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를 통해 가격 결정권을 장악해 막대한 수익을 얻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과의 충돌 또한 불가피했다. 특히 1892년 홈스테드 파업 사건은 회사 측이 사설 경비대를 고용해 노동자들을 강경 진압하는 과정에서 여러 명이 사망하는 비극으로 번졌다. 당시 카네기는 해외여행 중이었지만, 그의 명성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렇게 냉정하고 때로는 잔혹하기까지 한 사업 방식으로 거대한 부를 쌓은 카네기는 많은 이들에게 비난과 원망의 대상이 돼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오늘날 카네기는 되레 가장 존경받는 자선 사업가로 여겨지며 역사적인 위인으로 기억된다. 과연 이 극적인 변화의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또 다른 특별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

도서관, 콘서트홀… 기부의 선구자

카네기의 성공이 더욱 주목받는 이유는 막대한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기부 철학을 실천했다는 데 있다. 그는 1901년 자신이 세운 철강회사 카네기스틸을 금융가 J P 모건에게 매각하며 은퇴했고, 이후 삶의 대부분을 기부 활동에 헌신했다. 그는 생전에 재산의 90%를 교육, 문화, 평화 증진 등을 위한 자선 사업에 기부했다. 또 “부자로 죽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To die rich is to die disgraced)”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부자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해 부를 사회로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생전에 약 3억5000만 달러(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수백억 달러)를 기부했다. 특히 도서관, 교육기관, 예술시설 등의 설립을 적극 지원해 사회 전체의 지식과 문화 수준을 높이는 데 힘썼다. 미국과 전 세계에 걸쳐 그가 설립을 지원한 도서관만 25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카네기멜런대의 설립은 그의 교육과 사회 발전에 대한 열정을 잘 보여준다. 카네기는 기술과 공학 분야의 실무적이고 실용적인 교육의 필요성을 깊이 느껴 1900년 카네기기술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훗날 전 세계적으로 명문대로 인정받는 카네기멜런대로 발전했으며 공학, 컴퓨터과학, 경영학 등의 분야에서 수많은 우수 인재들을 배출하고 있다.

또한 뉴욕의 카네기홀 설립도 중요한 예술적 기여로 평가된다. 카네기홀은 1891년 개관 이후 클래식 음악과 공연 예술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차이콥스키와 같은 유명 음악가들의 공연과 전설적인 무대가 펼쳐진 역사적인 장소다. 오늘날에도 카네기홀은 세계적 명성을 유지하며 예술과 문화 발전에 지속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카네기의 철학은 ‘부를 창출한 기업가는 그 부를 사회를 위해 현명하게 써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그는 부의 축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사회 발전과 사람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활용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한국에 필요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카네기의 기부 정신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도 커다란 시사점을 준다. 한국은 불과 몇십 년 만에 경제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뤘지만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사회적 불평등과 자원 분배의 불균형 문제에 직면해 있다. 특히 한국 기업가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은 미국과 비교하면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다.

단적인 예로, 미 하버드대는 기업인과 동문들의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기부 덕분에 기부기금이 무려 70조 원에 달한다. 이 덕분에 하버드대는 학생들의 장학금 지원부터 혁신적인 연구 활동까지 든든한 재정적 토대를 갖추고 있다.

반면 서울대의 기부기금 규모는 하버드대의 100분의 1에 불과하다. 한국의 경제 규모와 인적자원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초라한 현실이다. 이러한 차이는 결국 한국이 지식과 기술 경쟁력에서 뒤처지게 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카네기와 같이 성공한 기업가들이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적극 실천한다면 우리 사회는 보다 건강하고 균형 있는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기업인들은 과거 자본주의가 미성숙했던 시절 소액주주와 노동자, 소비자 등 이해관계자들에게 냉정하고 때로는 무자비한 모습으로 부를 축적한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다 보니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도 성공한 기업가들에 대한 존경이 약하다. 이는 단기적으로 기업의 가치 창출에 부정적일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한국에서 훌륭한 기업가가 나오기 어렵게 만드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

물론 옛 기업인들을 현재의 윤리적 기준으로만 평가할 필요는 없다. 당시 한국 경제의 최우선 가치는 어떤 방식으로든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는 것이었다. 이제는 그런 옛 기업인들도 사회적 책임과 기부를 통해 명예를 회복하고 존경받을 수 있다. 전 세계인들은 오늘날에도 카네기멜런대의 로보틱스 연구 성과에 감탄하고, 카네기홀에서 펼쳐지는 조성진과 같은 세계적인 예술가들의 콘서트를 감상하며 카네기의 이름을 기리고 있다. 즉, 철강왕 카네기가 이미 100여 년 전 보여준 모범을 한국 기업인들도 충분히 실천할 수 있다.

부의 창출이 단지 개인의 성취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기여로까지 이어질 때, 그 가치는 더욱 빛나고 커진다. 한국의 기업가와 성공한 투자자들이 카네기처럼 자신들의 부를 교육, 문화,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기부와 투자로 연결한다면 한국 역시 지속 가능한 성장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카네기의 삶과 철학은 우리에게 부의 진정한 의미와 사회적 책임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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