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뉴 포도원에서의 가족의 회복
프랑스 부르고뉴(Bourgogne) 와인 농장은 2000여년 이상 이어져 온 유럽 최고의 와인 산지 중 하나다. 지금은 프랑스 지방의 하나지만 과거 15세기까지 부르고뉴 공국으로서 위용을 떨치며 오늘날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일대까지의 방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던 지역이었다. 그런 유서 깊은 곳이어서 중세 귀족들이 지은 아름답고 역사 깊은 성과 수도원이 많았고 집들과 거리도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세드릭 클라피쉬가 연출을 맡은 영화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2017)은 부르고뉴의 사계절 풍광을 담은 영화다. 세드릭 클라피쉬 감독은 <라이즈> 등의 영화로 인간관계의 회복과 삶의 감동을 영화 속에 담는 감독이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백 투 버건디(Beck to Burgundy)>인데, 부르고뉴의 영어식 명칭이 버건디여서 ‘고향 부르고뉴로 돌아가다’라는 의미의 제목이다. 붉은 와인색을 버건디색이라고 할 만큼 이 지역이 레드와인의 명산지다. 원래 프랑스 원제는 <Ce qui nous lie>으로 ‘우리를 묶어주는 것은’이라는 의미다.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와인 농장을 부모에게 물려받은 세 남매, 그들을 묶어주는 것은 바로 그 포도 농장, 과거의 추억이라는 의미를 강조한 제목이다.
와인 농장을 하는 부모님과 똑같은 삶을 살아야 된다는 갑갑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향을 떠나 10년간 세계를 떠돌다 호주에 정착하여 와이너리를 하던 첫째 아들인 장(피오 마르마이)은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잠깐 방문할 생각으로 고향 부르고뉴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막상 돌아오자 지겹다고만 생각되던 어릴 적 남매에게 와인 맛을 알려주던 아버지 모습과 정겹게 그네를 함께 타며 놀던 동생들과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포도원을 실제로 운영하는 책임을 지며 살아가는 의지 강한 둘째인 딸 줄리엣(아나 지라르도)은 오빠가 돌아와 반갑기 그지없다. 이 지역의 명망 높은 와인 가문과 결혼한 막내 아들 제레미(프랑수아 시빌)는 처갓집 눈치를 보며 지낸다. 오랜만에 다시 모인 세 남매는 반가울 새도 잠시, 첫째 장이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유산인 포도원과 함께 50만 달러에 달하는 상속세까지 내야 하는 상황이 된다.
이 영화는 부르고뉴 포도원을 운영하는 사람의 다큐멘터리처럼 이들의 삶에 밀착해 있다. 포도원을 경작하는 일은 적절한 시기에 맞춰 포도 따는 일에서부터 저장까지 힘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시기를 놓치면 포도맛이 변하기 때문에 많은 인부들을 고용하여 한꺼번에 포도를 따야 하지만, 주인의 마음과 일당을 받는 일꾼들의 마음은 천지 차이다.
일꾼 중에는 귀한 포도송이를 서로에게 던지며 장난을 하는 사람도 있어서 줄리엣은 그들에게 소리 높여 야단을 친다. 그러나 심술 궂은 일꾼은 일당 돌려주면 될 거 아니냐면서 오히려 더 큰소리다. 게다가 옆 포도원 주인은 알면서도 은근슬쩍 남매들의 포도원을 침범해 포도를 따기도 한다. 화가 난 줄리엣은 옆집 포도원 주인에게 해마다 그런다면서 포도송이를 그에게 집어던진다. 이런 실제적인 에피소드가 영화에 빼곡하게 담겨 있어서 포도원의 일상과 삶이 그대로 드러난다.
드넓은 포도원의 포도 이파리 색깔의 변화처럼 사계절과 두 번의 수확기가 영화의 스토리 타임을 형성한다. 녹색이었던 이파리가 갈색으로 변화하고 그 위에 눈이 덮이면서 시간이 지나가는 동안 세 남매는 그들 서로를 끈끈하게 묶어주는 땅을 보존하기 위해 땀을 흘리면서 서로에 대한 관계를 돈독히 하고 신뢰를 쌓아간다. 잠깐 머물다 갈 예정이었던 장은 포도를 함께 수확하고 포도를 발로 밟아 발효탱크에 넣는 등 와인을 만드는 과정을 함께 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반감도 점차 사라지고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성을 되찾아간다.
영화에서 표현되는 와인 생산 과정 하나하나가 삶을 대하는 태도와 닮았다. 특히 장과 줄리엣이 와인 양조 과정을 통해 내적 성숙을 이뤄가는 과정을 그린다. 장은 어릴 적 아버지가 포도 농사 방법과 와인의 맛을 알게 하는 교육법에 싫증을 냈지만, 그 전통이 알게 모르게 장의 내면 깊이 잠재해 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게 된다. 와인을 만드는 과정이 가족을 되살리고, 그들만의 전통을 대대로 이어가게 한다는 것을 이 영화는 감동적으로 그린다.
와인 농사는 날씨 변화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자연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닫게 한다. 부르고뉴의 드넓은 포도 농원에 비치는 강렬한 햇살은 포도를 건강하게 자라게 하며 포도를 정성스레 대하는 포도원 가족들의 애정어린 손길이 포도의 빛을 발하게 한다. 이는 어떤 일이든 자연과 함께 인간의 정성이 합해져서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말해준다. 세 남매에게 닥친 상속세의 어려움도 장의 아내가 부르고뉴로 아들과 함께 찾아와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결국 장은 아버지와의 갈등을 자신이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과정에서 해결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가 전해주는 프랑스 와인의 전통적인 방식은 와인이 단순히 맛을 음미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와인에 담긴 정성과 의미들을 발견하는 그 자체라는 것을 말해준다. 세 남매가 상속세를 해결하고자 찾아간 전문가는 포도원을 팔면 큰 재산이 되고 상속세 문제도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며 팔 것을 권유한다. 그에게는 포도원이 경제적 가치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세 남매에게 포도원은 경제적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소중함이 있다. 그들의 추억과 과거, 가족의 사랑 등이 담긴 그곳은 그들 삶의 근원인 것이다.
영화는 전통과 가족이라는 테마에 어울리는 다소 고전적인 방식의 프레임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화면에 담긴 밝은 햇살이 내리쬐는 드넓은 부르고뉴 지역의 포도밭을 담은 영상미는 여느 영화 못지않게 뛰어나다. 포도원 풍광 자체가 그림처럼 아름다워 포도나무 열매가 한 방울 한 방울의 와인으로 숙성되는 과정이 자연과 인간이 함께 어우러져 숙성하는 과정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부르고뉴 포도원 촬영지 탐방
부르고뉴 지역에 들어서면 입구에서부터 14세기부터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세력을 가졌던 부르고뉴 귀족들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고풍스러운 건물이 우리를 맞이한다. 이 지역의 공작들은 프랑스 왕실과도 독립적인 권력을 행사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 이후 행정구역 개편으로 공국 개념이 사라졌지만, 그 위용은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 남쪽에서 북쪽 부르고뉴 방향으로 진입하면 ‘샤또 부르고뉴’라는 곳이 큰 연못을 앞에 두고 멋지게 자리하고 있다. 맞은편으로는 아름다운 야생화 풀밭이 끝없이 펼쳐져 평화로운 목가적 풍광에 한몫했다.
이 영화의 기술 고문이자 세 남매를 도와주는 마르셀 아저씨 역의 배우로 참여한 장-마르크 룰로(Jean-Marc Roulot)가 실제 뫼르소(Meursault) 지역의 와이너리 소유주로 영화의 전문성과 사실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고 촬영지를 제공해 주었다고 한다. 뫼르소 지역의 로케이션인 와이너리는 주소가 검색되지 않아 찾지 못했고, 대신 그 지역 도메인 코스테 코마르탕(Domain Coste-Caumartin) 와이너리를 방문했다. 와인 저장고에서 세 가지 와인 테이스팅을 했다.
세 와인의 미세한 맛의 차이가 비전문가인 우리한테도 바디감과 풍미가 확연이 다르게 느껴졌다. 그 맛의 차이는 그들이 와인제조 과정에 쏟은 정성과 노력의 결과의 총체일 것이다. 가히 부르고뉴 와인의 명성을 실감하게 해준 테이스팅이었다. 7대조부터 운영되어 왔다는 와인제조 과정의 비법이 있음직했다.
마을 골목의 건물들도 엔틱거리 그 자체였고 무척 아름다웠다. 집들이 있는 곳이 끝나자, 돌담이 쳐진 크고 작은 포도원들이 드넓게 펼쳐졌다. 뫼르소 외에도 샤사뉴-몽라셰와 퓔리니-몽라셰 등에서도 영화를 찍었다고 한다. 본(Beaune)은 부르고뉴 와인의 중심도시여서 사람들도 많이 살고, 거리에 차들도 많았다.
부르고뉴 지역의 사계절의 변화를 함께 담은 이 영화의 로케이션을 찾아가는 재미는 와인의 대표적 산지로서뿐만 아니라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건물들도 색다른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황영미 영화평론가
[영화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 예고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