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정두리 기자] 지난 13일 오전 9시 강원 태백시 철암동 지대에 위치한 심부 시추공 굴착 현장. 수목림을 한참 지나 인적 하나 없는 해발 750m 고지대에 다다르니 지름 10cm 이상의 대구경 심부시추공이 압도적인 위용을 드러냈다. 이 곳에선 지하 500m 내외의 암반 특성을 정밀 파악한다.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시스템의 실험·연구를 위한 전초단계로, 지난 7월부터 데이터 조사를 하고 있다.
정해룡 한국원자력환경공단 고준위기술개발원 책임연구원은 “이 시추 현장에선 물리검층 장비를 활용해 암반 특성을 분석하고, 부지의 지질환경, 지열 특성, 안전성 등을 평가해 향후 연구 및 처분시설 설계에 활용한다”면서 “우리나라 고준위 방폐물 관리 사업에 첫 발을 뗀 역사적 현장”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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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강원 태백시 철암동 지대에 위치한 심부시추공 굴착 현장. (사진=정두리 기자) |
인구소멸도시서 ‘인재양성요람’으로…태백시와 ‘윈윈’
국내 고준위 방사성폐기물(방폐물) 관리 기술 자립을 위한 연구용 지하연구시설(URL)이 강원 태백시에 들어선다.
고준위 방폐물은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오는 사용후핵연료와 같이 방사능 농도가 높은 폐기물이다. 높은 열과 강한 방사선을 배출하기 때문에 오랜 기간 동안 안전하게 관리해야 한다. URL은 이 고준위 방폐물의 처리장과 유사한 환경을 만들어 그동안 개발된 처분 기술 등의 실증시험을 하기 위한 순수 연구시설을 의미한다.
즉 URL은 고준위 방폐물 처분 부지를 찾기 전 기술 검증을 위한 ‘전임상’ 단계로 비유된다. 여기서 확보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향후 처분시설 부지 내 지하연구시설에서 ‘임상’ 단계 연구를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한 전국 지자체 공모 결과, 지난해 연말 태백시가 만장일치로 최종 부지로 선정됐다.
총 7개 광역지자체와 10개의 기초 지방자치단체가 참여 검토 끝에 최종적으로 태백시가 단독으로 유치의향서를 제출했고, 단독 부지 신청임에도 민간위원 20명으로 구성된 부지선정평가위원회가 암종 적합성, 주민수용성 등 8개 평가항목에 대한 심사 결과, 태백시가 URL 건설에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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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오전 강원 태백시 철암동 지대에 위치한 심부시추공 굴착 현장을 기자들이 둘러보고 있다. (사진=원자력환경공단) |
김진하 원자력환경공단 고준위기획실 URL추진팀장은 지난 12일 태백시청에서 진행한 브리핑에서 “고준위방폐물관리특별법에 따라 연구용 지하연구시설 설치는 재량이 아닌 법적 의무”라며 “각국의 지질 특성이 달라 해외 기술 도입이 곤란하고, 기술 종속과 국부 유출 우려도 있어 자체 연구가 불가피하다”며 이번 사업 추진 배경을 설명했다.
태백URL의 사업비는 지상시설 805억원, 지하시설 4610억원, 연구·개발(R&D) 390억원을 포함해 총 6475억원 규모로 이뤄진다. 초기 사업 추계 당시 5138억원에서 안전·환기·대피로 확보 등 수직구 설치 관련 예산이 추가됐다. 총 사업비는 공단에서 관리하는 기금으로 쓰일 예정으로, 2026년 착공을 해 2028년 설계 완료, 2029년 환경영향평가 및 매장유산 지표조사 등을 거쳐 2032년 준공할 계획이다.
공단은 태백 URL을 안전성을 확실히 담보하면서 연구시설을 개방·견학할 수 있도록 해 국민 수용성을 높이겠다는 방침이다. 향후 대학생 참여형 과제(PBL)와 재직자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해 전문 인력도 최대 410명까지 양성할 계획이다. 이는 대한민국 대표 도시소멸 위험지역인 태백시에도 ‘윈윈’이 되는 결과다. 1988년까지 인구 11만 5175명이었던 태백시의 인구는 현재 3만 8272명(2024년 4월 기준)으로 3분의 1도 채 되지 않는다.
이상호 태백시장은 “태백 URL은 에너지 대전환에 나서는 태백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도 궤를 같이 한다”면서 “후속절차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지난 12일 태백시청에서 진행한 산업부 출입기자단 태백시·한국원자력환경공단 브리핑 현장. (사진=원자력환경공단)
다만 이를 두고 일부 학계에선 태백 부지 선정이 부적절하다는 반대 목소리도 나온다. 한국원자력학회 내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특별법 대응 특별위원회(특위)’는 영구 처분장과 다른 지질환경에서 얻은 데이터의 활용성이 낮은 점을 들어 부지 선정을 다시 해야 한다고 입장이다. 특위는 “우리나라는 지난 30년간 연구를 통해 화강암을 기본 암반으로 하는 처분 방식을 개발해 왔는데 태백 부지는 이암, 사암, 석회암 등이 혼재된 복합 퇴적암층으로 확인돼 지질환경 유사성 원칙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에 공단은 지표물리탐사 당시 지하연구시설이 설치될 심도 500m를 감안해 665m 부근까지 시추 조사해 채취한 암추(시추코어)를 직접 공개했다. 시추코어는 시추장비를 이용해 땅속에 구멍을 뚫어 채취한 원기둥 모양의 암석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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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 URL 지표물리탐사 당시 시추조사를 실시해 채취한 암추(시추코어). 심도 665m에서 홍제사화강암이 채취됐다. (사진=정두리 기자) |
부지조사 분과위원장인 권상훈 연세대 지질학과 교수는 “4개의 시추공에서 나온 코어 가운데 심도 665m 부근엔 충분한 규모의 결정질암인 홍제사화강암이 분포했다”면서 “맨 바닥은 홍제사화강암, 그 위에는 퇴적암 구간, 다시 그 위에 홍제사화강암으로 구성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URL 부지가) 단일 화강암이어야 한다는 규정은 없으며, 국내 지질 조건에서는 주어진 암종이 얼마나 적합한지를 보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덧붙였다.
고준위방사성폐기물 심층처분시설에 관한 일반기준에 따르면, ‘처분고(처분공 또는 처분용 터널) 예상위치에 단일 기반암이 위치하고 있는지’가 URL 설치 부지를 평가하는 핵심조건이다.
김진하 팀장도 “처분시설이라면 입구부터 단일 암종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일리가 있지만, 퇴적암이 덮개암으로 핵종 이동을 지연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며 “한국에서 지표에서 500m까지 단일·균질한 결정질 화강암체를 찾기는 어렵다는 게 업계 정설”이라고 말했다.
현재 산업통상자원부는 과기정통부와 태백 URL의 예타 면제 대상 사업을 위한 협의에 나선 상태로, 조만간 결과가 나올 예정이다.
조성돈 공단 이사장은 “우리나라 고유의 지질특성에 맞는 ‘한국형 처분시스템’을 개발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국가적 관리 체계로 태백 URL이 될 것을 확신한다”면서 “국가 책무 이행과 국민 안전 확보를 위한 필수 인프라로 거듭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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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 URL 조감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