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질서 격변 속 체계적인 비전 필요해
그럴싸한 슬로건, 레토릭은 통하지 않아
정권마다 외교도 리셋되면 신뢰 못 쌓아
진영논리로 외교 입지-실행력 좁힐 건가
첫째, 격변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외교정책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체계적인 비전과 논리가 필요하다. 미중 전략 경쟁에서 한국은 어느 편을 들어야 하는가, 종잡을 수 없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행보 속에서 한미 관계를 어떻게 관리해 나가야 하는가, ‘적대적 두 국가론’을 내세우고 있는 북한과 어떠한 관계를 맺어가야 할 것인가 등 급박한 당면 과제가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세부 정책을 가이드할 외교 비전과 원칙이다. 핵심은 한국이 원하는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국제질서의 모습을 설계하는 일이다.
최근 모범 사례로 로런스 웡 싱가포르 총리의 연설을 들 수 있다. 전 총리까지 총동원해 자국이 원하는 국제질서의 비전과 내용을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미국과 중국 등 강대국 중심의 지정학 현실을 비판하며, 상대적으로 약소국인 싱가포르가 취할 수밖에 없는 대안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옹호했다. 힘보다 지혜로 주변 강대국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앞으로 다가올 엄혹한 국제정치 속에서 국민들의 단결을 촉구하는 노력을 보였다.
한국의 차기 정부에 필요한 것은 그럴싸해 보이는 외교 슬로건이나 레토릭이 아니라 명확한 이론이 깔려 있는 국제질서 담론이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미래의 국제질서를 놓고 새로운 언어로 비전과 정책을 제시하는 국가지도자는 국내는 물론 지구적 공감을 얻어 낼 수 있다. 신냉전, 다극질서, 패권 경쟁 등 현재를 묘사하는 개념들은 일면의 진실만을 담고 있다.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정부 담론은 잘못된 질문을 만들고, 공허한 논쟁을 유발한다.둘째, 국내 정치의 진영 논리에 휘둘려 매번 뒤집히는 외교정책은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혼란만 가져온다. 정당에 따라 바뀌고, 심지어 같은 정당의 다른 정부에 따라 외교정책이 뒤집힌다면 정책의 연속성이 확보될 수 없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수의 정책 패러다임이 경쟁하며 더 좋은 정책을 창출하는 것은 좋은 일이나 이전 정부들의 공과를 냉정히 평가해야 한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제를 택하고 있는 미국을 보더라도 트럼프 대통령은 조 바이든 행정부와 지나친 차별화에 집착해 정책의 대안 범위를 스스로 좁혔다. 직전 행정부의 모든 정책을 절대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규정해 같은 정책을 펼 퇴로를 완전히 차단했다.
한국의 외교정책이 5년짜리에 그치는 것으로 인식되면 국제사회의 어느 정부도 5년 후를 내다보고 한국을 대할 리 만무하다. 정권이 바뀌면 입장도 금세 바뀔 것을 우려해 한국과 장기적인 관계 형성에 난색을 표하는 국가들이 이미 적지 않았다. 한국에 원치 않는 정권이 들어서면 5년을 기다리며 반대 정당의 정권이 들어설 것을 기대하는 경우도 있다. 정책이 아닌 정치로 갈라진 한국의 진영은 우리의 외교적 입지를 갉아먹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차기 정부가 역대 정부의 정책과 차별화되는 새로운 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전 정부들의 성과에 대해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명확한 근거를 들어 비판할 때 큰 신뢰를 받을 수 있다. 이전 정부 뒤집기 외교는 스스로의 외교를 5년의 유통기한으로 못박는 자가당착이 된다.셋째, 창의적이고 헌신적인 정책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관료들의 입지를 보호하고 자율성을 독려해야 한다. 한국의 핵심 외교정책은 보통 대선 과정에서 캠프 인사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캠프에서 급조되거나 합의 기반이 협소한 정책은 정부 출범 이후에도 정작 이를 실행할 관료들의 이해와 동의를 구하기 쉽지 않다. 상명하달식 정책에 자발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면 실행 과정에서 힘이 빠지고 이는 결국 정부 전체의 약점이 될 수밖에 없다. 부처 간 광범위한 협력이 더욱 중요해지는 요즘, 정부 전체의 포괄적 동의를 이끌어내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더욱이 이전 정부 정책을 주도적으로 실행했던 관료들을 압박하거나 처벌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정치적 중립성을 의무로 여기는 관료들의 노력을 진영 논리로 평가하고 이를 빌미로 처벌한다면 어느 관료도 정부의 정책에 헌신하지 않을 것이다. 차기 정부는 전 정부를 비판하면서 답습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외교의 전기를 마련하기를 기대해본다.
전재성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 좋아요 0개
- 슬퍼요 0개
- 화나요 0개